2004년 11월 16일
대학입시에 얽힌 기억, 그리고 옛 은사의 이야기.
2004. 11. 16 에 쓴 글
올해도 어김없이 매우 추워진다. 10년에 눈이 한 번 오면 뉴스 지역국의 헤드라인거리가 되는 - 그리고 5cm 넘게 오면 버스 노선이 하나 빼고는 모두 멈춰선다. 경남 도내에 제설차는 단 한 대도 없다는 통계를 윗동네 사람들은 믿지 못한다 - 따뜻한 동네에 사는지라 수은주 내려가는 데에는 유독 민감한 것이 이 지역 사람들이다. 또한 여기가 거의 모든 삶의 무대였던 나인지라 부쩍 살갗을 파고드는 싸늘함이 거세어졌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조용히 되뇌인다. '아하, 입시의 계절이다.'
기억은 꼭 1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95년 1월, 서태지와 아이들이 유례없는 6일 연속 3만명 동원으로 이미 그 공연 자체가 아닌 거대한 락에 기반한 대중예술 퍼포먼스를 [다른 하늘이 열리고]라는 이름으로 올리던 그 때 말이다. 조선일보 사설란 중단의 제목은 [혹한 입시 피하려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혹독한 글쓰기 연습에 시달리면서 스크랩했던 것들이라 보라색의 200자 원고지 뭉치, 다 닳아버린 몽당연필과 볼펜뚜껍과 같이 내 뇌리 속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혹한 입시라는 그 구절.
그리고 몇 년 후, 예의 사람들과 똑같은 길을 거쳐 똑같이 옆에 있는 놈의 머리를 찍어누르며 세상은 전쟁이라는 것을 생애 맨 처음 깨닫고 그 첫 전투에서 난 패배했다. 내 밑에 깔린 시체는 많았지만 나 또한 내 위를 밟고 올라선 자를 무력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재도전했다. 체력을 야금야금 좀먹는 당뇨라는 병마를 딛고 일어서서 전해보다 많은 놈들을 까부쉈지만 여전히 목표하던 고지는 점령하지 못했고 아킬레스건인 수I에 덜미가 잡혀 단지 교두보로 놓아둔 곳에 안착할 뿐이었다.(그리고 응시한 대학마다 깽판을 놓았다.) 몸도 마음도 춥기만 한 계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던 것이다. 서태지가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게릴라 콘서트를 하며 서울 천지 교통을 마비시키던 1996년(필승 뮤비를 이지랄을 하면서 찍었다. 역시 위인이다)이나, 내가 재수생이던 2000년 11월 17일이나, 애매한 신분으로 국가에 예속되어 1시간 지연근무를 명 받은 오늘이나, 날은 맑았다 구름 속에 스러지지만 여전히 대기는 살을 에는 듯 추울 뿐 말이 없다.
이왕 기억을 되돌린 차에 나는 내 회색 뇌세포 한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옛 선생의 얼굴을 고이 펴낸다. 송승환. 마산고등학교의 명물 국어교사. 쉬는 시간에는 항상 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를 했고 우리는 그를 약간 기인 취급하면서도 흔쾌히 깍두기로 끼워 넣었다. 30대 중후반답지 않게 그는 상당히 드리블을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지금 입시생들도 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교 독서평설이라는 꽤 유명한 수험생용 언어영역 무크지 비슷한 곳에 매달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그에게 [송뽀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뽀대라는 것은 '뻥'이 중부경남 사투리로 변한 것인데, 95년쯤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 양반이 뽀대쟁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는 간단하다. 송뽀대는 결코 수업시간에 수업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공부는 사교육, 즉 애비 에미 고혈을 학원 계좌에 다 처넣으며 잠은 잠대로 못 자고 집에 열두시 반에 기어들어가면서 다 하니까, 그 시간에 그는 공교육이 가르쳐야 할 가이드라인 - 진도 - 만 준수하고는 나머지 시간을 지식의 퍼포먼스 시간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전장에서 16세 전후의 소년병이 무서운 것은, 그래서 국제협약으로 이를 강력히 제한하는 것은 그들이 너무 순수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오히려 보수적이고 교조적이며 그 결과 제일 잔인해지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는 그런 우리들의 성격을 간파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 [지식의 향연]시간에, 그는 가끔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발언을 자주 했다. 이를테면 [왜 공산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냐?], [이상이 천재라고 생각하냐? 병신들. 임화의 "비내리는 요꼬하마의 부두"를 낭송해 봐라!]라든가, [컵라면을 먹어도 반드시 그릇에 부어서 먹도록. 그것이 인텔리겐차라 지켜야 할 습속이다.]같은 요상한 말들.
(그의 어록 중 생각나는 말들이 저것 밖에 없어서 더 이상 쓸 수 없고 나의 기억 속 편린들은 그를 얼핏 고루한 학자타입 샌님처럼 만들어놓지만, 그는 대학강단의 교수라기보다는 도올같은 카리스마와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오해가 없도록 덧붙여 둔다.)
우리는 그때까지 연대 사태를 일으킨 한총련은 전부 정신병자들인 줄 알았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고 진보주의자들은 PC통신의 플라자와 대학 울타리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으며, KBS의 카메라는 항상 신촌로터리의 철시한 상인이 매상 떨어진다고 징징대는 소리만 찍어 보여주었다.
좌우간 우리는 그 얘기를 재미있게 들었지만 - 조는 놈이 한 놈도 없었다! - 항상 쉬는 시간이 돌아오면 너무나도 우리의 [상식]과 맞지 않는 그의 설법을 [뽀대]라고 치부해 버렸던 것이다. 대학 와서 세간의 존경과 명성을 손에 쥔 내노라하는 석학들이 그가 말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발언들을 하는 바람에 때늦은 당혹감을 느껴야 했던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의 어록 중 한 가지가 더 생각난다. 수학능력시험을 1주일 앞두고 다들 정석 책 두권(베고 자기 딱 알맞은 높이. 아는 사람은 알리라)에 쓸린 볼을 얼얼하게 붙잡고 고개를 들어 보니 이미 쉬는 시간은 끝나 국어시간이 되었고, 최후의 수업을 시작한 송선생은 여전히 그 날도 축 처진 눈에 약간 맹한 목소리와 괴짜 인텔리스러운 특이하고 담담한 화법으로 우리의 상식에 약간 궤가 틀어지는 소리를 남겼다.
[프랑스의 대학 입시는 <바깔로레아>라고 하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으로 결정된다. 그들은 바깔로레아에 응시하여야만 하며, 이 시험은 우리처럼 상당히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 치들은 여기에 합격 못 하면 대학은커녕 졸업도 못한다. 우리나라의 찍기식 오지선다와는 달리 전부 [논술형]이며, 시험은 이틀에 걸쳐 치루어지기 때문에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기도 한다고. 오픈 케이스로 치기 때문에 노트를 참고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어이어이, 사기라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 양반들은 채점의 기준이 우리처럼 무언가 팩트를 얼마나 알고 있으며 이해했나가 아니라 그 팩트를 기준으로 어떤 오피니언을 내는가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다르다.
하여간, 근데 갸들은 나 바깔로레아 보러 간다 카면 우리처럼 무슨 소 도살장에 집어넣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험 전날 자신이 국민학교, 꼴레쥐라는 중학, 리쎄라는 고등학교 과정 동안 배운 모든 것을 마음껏 뽐낼 수 있다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느그의 상식에는 상당히 어긋나는 소리겠지만, 사실이다.
내 생각에는 지구 반대편의 네놈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기성세대가 너희들에게 주입하는 귀에 딱지앉은 소리인 <인생이 결정되는 관문이다>라는 소리는 지금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라. 너희들이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뭘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너희들의 소리를 엿같은 어른들에게 카운터 펀치로 날려 버리는 것이다.
우중충한 얼굴은 집어치워라. 여기 기회가 왔음에 왜 네놈들은 기뻐하지 않느냐?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 준다고 생각하고 가라. 그리고 대학 입시 포기한 놈은 백지내고 나와도 괜찮다. 절대 비굴해지지 마라. 벌써부터 시스템의 노예가 된 것처럼 인상 구기지 말고 그 얼굴 다리미로 다려버리기 전에 활짝 펴라. 네놈들은 어차피 내일부터 자유 아니냐?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하나라도 더 작살내서 승자가 되라. 그게 싫다면 아예 이 길에 들어서지 말았어야 했는데 인문계 고등학교 들어온 이상 네놈들에겐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일단 내일의 기회는 소중하게 사용한 뒤에 그 이후의 내일을 결정하란 말이다. 알았냐? 그럼 이만 수업 끝.
아 그리고 봉실아, 느그 공고 아들하고 축구 붙는다면서? 지면 쪽이다. 알았나?]
(* 생각해보니 장봉실이는 인문계가 아니라 자연계 반이었다. 그러므로 말한 대상이 봉실이일 리가 없다... 그럼 누구한테 말한 거였지? 축구 좋아하는 놈이면... 경탁이었나? 성민이었나? 가물가물한다. 하여튼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보내는 맨 마지막 말 마무리는 저 내용이었다.)
워낙 오래 된 기억이라 선명하진 않고 어쩌면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요 이상으로 미화되었을 수도 있다. 그의 말이 진학시스템에 몸담고 있는 전직 노이에-링케(신좌익) 인텔리겐차의 궤변인지, 아니면 교사로서 학생을 아끼는 진정한 마음 속의 우러남이었는지 아직까지도 나는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송뽀대 선생의 저 말 한 마디는 이후 암울했던 1년의 혹독한 스케줄 속에서도 나만의 O captain, my captain으로 기능했다는 사실이다.
수능이 끝난 이후의 학교생활은 축구와 비디오의 연속이었다. 매직으로 Nice와 Reebook을 그려넣은 체육복은 전문 거리예술가가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예 매우 현상학적인 마이클 조던과 호나우두, 히바우두, 호마리우(그때는 로마리오라고 했다) 등의 얼굴이 그려졌고 선생들도 웬만하면 터치하지 않았다. 급기야 무료해진 우리들은 멀쩡한 철제 사물함과 1인치 두께의 강력한 합판으로 된 책상을 문자 그대로 [아작내기]시작했다. 특히 별명이 <무라다>인 놈은 그야말로 일제시대 강제징용 십장처럼 생긴 외모답게 수도 한 방으로 금을 가게 하고, 세 방으로 완전히 책상을 두 쪼가리 내어버렸다(그걸 보면서 팔에 힘을 준 것만으로 교복을 조끼로 만들어버리던 중3시절의 권모군이 생각났다. 어딜 가나 수험 이후의 수험생놈들은 똑같은 짓을 하나보다).
그 때, 때를 맞춰 우리 학교 선배라고 말만 들은 고 천상병 시인의 생애를 그린 [귀천]이라는 연극의 단체 관람이 우리 학교에도 (당연히?) 돌아오게 되었다. 브레히트적인 기법에, 악곡적 기법을 가미하여 동양 관객 - 즉 말초적 엔터테인먼트만 밝히는 놈들 - 들의 구미에 맞게 형상화한 그 연극을 이재상 연출가는 [신극]이라는 이름으로 팸플릿에 소개했다. (물론 한 부에 2천원 하는 팸플릿을 우리는 "사기다 씁새들"이라며 아무도 사지 않았고, 다만 로비에 있는 것을 슬쩍 훔쳐 와서 돌려서 본 후 지금도 고이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 막이 올라가기 전의 암전에 갑자기 한 줄기 스포트라이트가 무대 오른쪽을 비추었다. 악동들도 다들 조용해지고 목울대를 꿀꺽 울린 후 그 곳을 쳐다보았다. 그 곳에 나타난 인영 둘은 연출가와 우리의 송뽀대였다. 우리는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송 뽀 대! (헤이) 송 뽀 대! (짝) 송 뽀 대! (헤이) 송 뽀 대! (짝)"
...... HOT가 마여고에 왔어도 그 정도의 대환호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연출가의 간단한 얘기를 들은 후, 송선생은 마이크를 잡고 예의 그 어눌하고 담담한 말로 우리에게 간단한(?) 지시사항을 말했다.
[에... 여러분들은 아마도 이러한 연극의 무대를 처음 접하리라 생각되는데, 촌놈들아! 앞으로 여러분들도 대학에 진학하거나 하면 이런 예술의 무대를 접하게 될 것이다. 지성인이 되면서 이런 기회는 늘어날 것이고, 여자 꼬셔서 대학로에 에쿠우스 보러 갔는데 거기서 삐삐 핸드폰 울려대면 가스나가 빠말쌔기 때리고 달아 난다. 그러니 공연은 즐겁게, 그러나 조용히 매너있게 즐기도록. 그리고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의 선배이자 한국이 낳은 천재 시인 중 하나인 천상병님의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다. 너희들 선배 이야기니 그 앞에서 침을 택 뱉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알겠냐?"]
[예-에]
좌석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이후 아무도 졸거나 떠들지 않았다. (라기보다는 그 연극이 워낙 잘 만들어진 공연이기도 해서, 전부 넋이 나가 있다가 우리는 공연이 끝나고 커튼 콜을 3회 할 정도로 기립박수를 쳐댔다. 어떤 놈은 로비에서 꽃다발을 사 와서 무대 위로 난입해서 꽃다발을 기사처럼 무릎꿇고 건네기도 했다. 난 아직도 [아가씨와 건달들]같이 대놓고 뮤지컬로 나가는 공연을 제외하고는 그 연극처럼 감동적인 무대를 본 적이 없다.)
며칠 후, 어떤 기품있는 중년의 부인이 교장실에 왔다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바로 고 천상병 선배의 부인인 목순옥 여사였다. 담탱이였는지 R6선생이었는지는 몰라도 좌우간 누군가를 통해 들은 그의 방문 목적은 우리에게 감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흘 동안 이 소도시에서 남편을 추억하기 위한 공연에 힘을 쏟았습니다만, 귀교처럼 공연매너를 잘 지켜준 청소년 관중은 없었습니다. 역시 남편의 모교네요. 감사드립니다.]
랬대나. 뭐 R6 이창석선생이 허언은 안 하는 인물이니까 맞겠지.
올해도 어김없이 매우 추워진다. 10년에 눈이 한 번 오면 뉴스 지역국의 헤드라인거리가 되는 - 그리고 5cm 넘게 오면 버스 노선이 하나 빼고는 모두 멈춰선다. 경남 도내에 제설차는 단 한 대도 없다는 통계를 윗동네 사람들은 믿지 못한다 - 따뜻한 동네에 사는지라 수은주 내려가는 데에는 유독 민감한 것이 이 지역 사람들이다. 또한 여기가 거의 모든 삶의 무대였던 나인지라 부쩍 살갗을 파고드는 싸늘함이 거세어졌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조용히 되뇌인다. '아하, 입시의 계절이다.'
기억은 꼭 1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95년 1월, 서태지와 아이들이 유례없는 6일 연속 3만명 동원으로 이미 그 공연 자체가 아닌 거대한 락에 기반한 대중예술 퍼포먼스를 [다른 하늘이 열리고]라는 이름으로 올리던 그 때 말이다. 조선일보 사설란 중단의 제목은 [혹한 입시 피하려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혹독한 글쓰기 연습에 시달리면서 스크랩했던 것들이라 보라색의 200자 원고지 뭉치, 다 닳아버린 몽당연필과 볼펜뚜껍과 같이 내 뇌리 속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혹한 입시라는 그 구절.
그리고 몇 년 후, 예의 사람들과 똑같은 길을 거쳐 똑같이 옆에 있는 놈의 머리를 찍어누르며 세상은 전쟁이라는 것을 생애 맨 처음 깨닫고 그 첫 전투에서 난 패배했다. 내 밑에 깔린 시체는 많았지만 나 또한 내 위를 밟고 올라선 자를 무력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재도전했다. 체력을 야금야금 좀먹는 당뇨라는 병마를 딛고 일어서서 전해보다 많은 놈들을 까부쉈지만 여전히 목표하던 고지는 점령하지 못했고 아킬레스건인 수I에 덜미가 잡혀 단지 교두보로 놓아둔 곳에 안착할 뿐이었다.(그리고 응시한 대학마다 깽판을 놓았다.) 몸도 마음도 춥기만 한 계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던 것이다. 서태지가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게릴라 콘서트를 하며 서울 천지 교통을 마비시키던 1996년(필승 뮤비를 이지랄을 하면서 찍었다. 역시 위인이다)이나, 내가 재수생이던 2000년 11월 17일이나, 애매한 신분으로 국가에 예속되어 1시간 지연근무를 명 받은 오늘이나, 날은 맑았다 구름 속에 스러지지만 여전히 대기는 살을 에는 듯 추울 뿐 말이 없다.
이왕 기억을 되돌린 차에 나는 내 회색 뇌세포 한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옛 선생의 얼굴을 고이 펴낸다. 송승환. 마산고등학교의 명물 국어교사. 쉬는 시간에는 항상 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를 했고 우리는 그를 약간 기인 취급하면서도 흔쾌히 깍두기로 끼워 넣었다. 30대 중후반답지 않게 그는 상당히 드리블을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지금 입시생들도 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교 독서평설이라는 꽤 유명한 수험생용 언어영역 무크지 비슷한 곳에 매달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그에게 [송뽀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뽀대라는 것은 '뻥'이 중부경남 사투리로 변한 것인데, 95년쯤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 양반이 뽀대쟁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는 간단하다. 송뽀대는 결코 수업시간에 수업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공부는 사교육, 즉 애비 에미 고혈을 학원 계좌에 다 처넣으며 잠은 잠대로 못 자고 집에 열두시 반에 기어들어가면서 다 하니까, 그 시간에 그는 공교육이 가르쳐야 할 가이드라인 - 진도 - 만 준수하고는 나머지 시간을 지식의 퍼포먼스 시간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전장에서 16세 전후의 소년병이 무서운 것은, 그래서 국제협약으로 이를 강력히 제한하는 것은 그들이 너무 순수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오히려 보수적이고 교조적이며 그 결과 제일 잔인해지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는 그런 우리들의 성격을 간파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 [지식의 향연]시간에, 그는 가끔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발언을 자주 했다. 이를테면 [왜 공산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냐?], [이상이 천재라고 생각하냐? 병신들. 임화의 "비내리는 요꼬하마의 부두"를 낭송해 봐라!]라든가, [컵라면을 먹어도 반드시 그릇에 부어서 먹도록. 그것이 인텔리겐차라 지켜야 할 습속이다.]같은 요상한 말들.
(그의 어록 중 생각나는 말들이 저것 밖에 없어서 더 이상 쓸 수 없고 나의 기억 속 편린들은 그를 얼핏 고루한 학자타입 샌님처럼 만들어놓지만, 그는 대학강단의 교수라기보다는 도올같은 카리스마와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오해가 없도록 덧붙여 둔다.)
우리는 그때까지 연대 사태를 일으킨 한총련은 전부 정신병자들인 줄 알았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고 진보주의자들은 PC통신의 플라자와 대학 울타리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으며, KBS의 카메라는 항상 신촌로터리의 철시한 상인이 매상 떨어진다고 징징대는 소리만 찍어 보여주었다.
좌우간 우리는 그 얘기를 재미있게 들었지만 - 조는 놈이 한 놈도 없었다! - 항상 쉬는 시간이 돌아오면 너무나도 우리의 [상식]과 맞지 않는 그의 설법을 [뽀대]라고 치부해 버렸던 것이다. 대학 와서 세간의 존경과 명성을 손에 쥔 내노라하는 석학들이 그가 말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발언들을 하는 바람에 때늦은 당혹감을 느껴야 했던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의 어록 중 한 가지가 더 생각난다. 수학능력시험을 1주일 앞두고 다들 정석 책 두권(베고 자기 딱 알맞은 높이. 아는 사람은 알리라)에 쓸린 볼을 얼얼하게 붙잡고 고개를 들어 보니 이미 쉬는 시간은 끝나 국어시간이 되었고, 최후의 수업을 시작한 송선생은 여전히 그 날도 축 처진 눈에 약간 맹한 목소리와 괴짜 인텔리스러운 특이하고 담담한 화법으로 우리의 상식에 약간 궤가 틀어지는 소리를 남겼다.
[프랑스의 대학 입시는 <바깔로레아>라고 하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으로 결정된다. 그들은 바깔로레아에 응시하여야만 하며, 이 시험은 우리처럼 상당히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 치들은 여기에 합격 못 하면 대학은커녕 졸업도 못한다. 우리나라의 찍기식 오지선다와는 달리 전부 [논술형]이며, 시험은 이틀에 걸쳐 치루어지기 때문에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기도 한다고. 오픈 케이스로 치기 때문에 노트를 참고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어이어이, 사기라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 양반들은 채점의 기준이 우리처럼 무언가 팩트를 얼마나 알고 있으며 이해했나가 아니라 그 팩트를 기준으로 어떤 오피니언을 내는가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다르다.
하여간, 근데 갸들은 나 바깔로레아 보러 간다 카면 우리처럼 무슨 소 도살장에 집어넣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험 전날 자신이 국민학교, 꼴레쥐라는 중학, 리쎄라는 고등학교 과정 동안 배운 모든 것을 마음껏 뽐낼 수 있다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느그의 상식에는 상당히 어긋나는 소리겠지만, 사실이다.
내 생각에는 지구 반대편의 네놈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기성세대가 너희들에게 주입하는 귀에 딱지앉은 소리인 <인생이 결정되는 관문이다>라는 소리는 지금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라. 너희들이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뭘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너희들의 소리를 엿같은 어른들에게 카운터 펀치로 날려 버리는 것이다.
우중충한 얼굴은 집어치워라. 여기 기회가 왔음에 왜 네놈들은 기뻐하지 않느냐?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 준다고 생각하고 가라. 그리고 대학 입시 포기한 놈은 백지내고 나와도 괜찮다. 절대 비굴해지지 마라. 벌써부터 시스템의 노예가 된 것처럼 인상 구기지 말고 그 얼굴 다리미로 다려버리기 전에 활짝 펴라. 네놈들은 어차피 내일부터 자유 아니냐?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하나라도 더 작살내서 승자가 되라. 그게 싫다면 아예 이 길에 들어서지 말았어야 했는데 인문계 고등학교 들어온 이상 네놈들에겐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일단 내일의 기회는 소중하게 사용한 뒤에 그 이후의 내일을 결정하란 말이다. 알았냐? 그럼 이만 수업 끝.
(* 생각해보니 장봉실이는 인문계가 아니라 자연계 반이었다. 그러므로 말한 대상이 봉실이일 리가 없다... 그럼 누구한테 말한 거였지? 축구 좋아하는 놈이면... 경탁이었나? 성민이었나? 가물가물한다. 하여튼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보내는 맨 마지막 말 마무리는 저 내용이었다.)
워낙 오래 된 기억이라 선명하진 않고 어쩌면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요 이상으로 미화되었을 수도 있다. 그의 말이 진학시스템에 몸담고 있는 전직 노이에-링케(신좌익) 인텔리겐차의 궤변인지, 아니면 교사로서 학생을 아끼는 진정한 마음 속의 우러남이었는지 아직까지도 나는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송뽀대 선생의 저 말 한 마디는 이후 암울했던 1년의 혹독한 스케줄 속에서도 나만의 O captain, my captain으로 기능했다는 사실이다.
수능이 끝난 이후의 학교생활은 축구와 비디오의 연속이었다. 매직으로 Nice와 Reebook을 그려넣은 체육복은 전문 거리예술가가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예 매우 현상학적인 마이클 조던과 호나우두, 히바우두, 호마리우(그때는 로마리오라고 했다) 등의 얼굴이 그려졌고 선생들도 웬만하면 터치하지 않았다. 급기야 무료해진 우리들은 멀쩡한 철제 사물함과 1인치 두께의 강력한 합판으로 된 책상을 문자 그대로 [아작내기]시작했다. 특히 별명이 <무라다>인 놈은 그야말로 일제시대 강제징용 십장처럼 생긴 외모답게 수도 한 방으로 금을 가게 하고, 세 방으로 완전히 책상을 두 쪼가리 내어버렸다(그걸 보면서 팔에 힘을 준 것만으로 교복을 조끼로 만들어버리던 중3시절의 권모군이 생각났다. 어딜 가나 수험 이후의 수험생놈들은 똑같은 짓을 하나보다).
그 때, 때를 맞춰 우리 학교 선배라고 말만 들은 고 천상병 시인의 생애를 그린 [귀천]이라는 연극의 단체 관람이 우리 학교에도 (당연히?) 돌아오게 되었다. 브레히트적인 기법에, 악곡적 기법을 가미하여 동양 관객 - 즉 말초적 엔터테인먼트만 밝히는 놈들 - 들의 구미에 맞게 형상화한 그 연극을 이재상 연출가는 [신극]이라는 이름으로 팸플릿에 소개했다. (물론 한 부에 2천원 하는 팸플릿을 우리는 "사기다 씁새들"이라며 아무도 사지 않았고, 다만 로비에 있는 것을 슬쩍 훔쳐 와서 돌려서 본 후 지금도 고이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 막이 올라가기 전의 암전에 갑자기 한 줄기 스포트라이트가 무대 오른쪽을 비추었다. 악동들도 다들 조용해지고 목울대를 꿀꺽 울린 후 그 곳을 쳐다보았다. 그 곳에 나타난 인영 둘은 연출가와 우리의 송뽀대였다. 우리는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송 뽀 대! (헤이) 송 뽀 대! (짝) 송 뽀 대! (헤이) 송 뽀 대! (짝)"
...... HOT가 마여고에 왔어도 그 정도의 대환호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연출가의 간단한 얘기를 들은 후, 송선생은 마이크를 잡고 예의 그 어눌하고 담담한 말로 우리에게 간단한(?) 지시사항을 말했다.
[에... 여러분들은 아마도 이러한 연극의 무대를 처음 접하리라 생각되는데, 촌놈들아! 앞으로 여러분들도 대학에 진학하거나 하면 이런 예술의 무대를 접하게 될 것이다. 지성인이 되면서 이런 기회는 늘어날 것이고, 여자 꼬셔서 대학로에 에쿠우스 보러 갔는데 거기서 삐삐 핸드폰 울려대면 가스나가 빠말쌔기 때리고 달아 난다. 그러니 공연은 즐겁게, 그러나 조용히 매너있게 즐기도록. 그리고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의 선배이자 한국이 낳은 천재 시인 중 하나인 천상병님의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다. 너희들 선배 이야기니 그 앞에서 침을 택 뱉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알겠냐?"]
[예-에]
좌석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이후 아무도 졸거나 떠들지 않았다. (라기보다는 그 연극이 워낙 잘 만들어진 공연이기도 해서, 전부 넋이 나가 있다가 우리는 공연이 끝나고 커튼 콜을 3회 할 정도로 기립박수를 쳐댔다. 어떤 놈은 로비에서 꽃다발을 사 와서 무대 위로 난입해서 꽃다발을 기사처럼 무릎꿇고 건네기도 했다. 난 아직도 [아가씨와 건달들]같이 대놓고 뮤지컬로 나가는 공연을 제외하고는 그 연극처럼 감동적인 무대를 본 적이 없다.)
며칠 후, 어떤 기품있는 중년의 부인이 교장실에 왔다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바로 고 천상병 선배의 부인인 목순옥 여사였다. 담탱이였는지 R6선생이었는지는 몰라도 좌우간 누군가를 통해 들은 그의 방문 목적은 우리에게 감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흘 동안 이 소도시에서 남편을 추억하기 위한 공연에 힘을 쏟았습니다만, 귀교처럼 공연매너를 잘 지켜준 청소년 관중은 없었습니다. 역시 남편의 모교네요. 감사드립니다.]
랬대나. 뭐 R6 이창석선생이 허언은 안 하는 인물이니까 맞겠지.
# by | 2004/11/16 22:57 | 단상 | 트랙백(2) | 덧글(15)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제목 : 3월 첫 포스팅-스승과 선생의 차이
대학입시에 얽힌 기억, 그리고 옛 은사의 이야기. <-박군네에서 트랙백 우선 포스팅을 읽기전에 박군의 포스팅을 읽어주기 바란다.내가 기억하는것들은 굉장히 단편적이고 그를 평가하기에 무척 부족한 정보가 많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여러가지 연으로 사람들과 만나게 되지만 그중 기억에 남아도 가슴에 남는 사람은 별로 없는게......more
제목 : 대학입시에 얽힌 기억, 그리고 옛 은사의 이야기.
대학입시에 얽힌 기억, 그리고 옛 은사의 이야기. 글이 좋아서 두고보려고 트랙백....more
부럽습니다.^^
아, 링크 감사드립니다.(_ _)
나야 뭐. 그 시점에서 제도권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었으니.
트랙백 해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