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 28일
크로싱

전부터 보겠다고 마음먹은 영화였지만 속세를 떠나 살다 보니 개봉한 줄도 몰랐다. 마침 오늘 폰 때문에 용산가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아마 그냥 제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서 조조 상영으로 용산에서 보았다. 상영관은 1.5개 정도(교차상영이 있다는 얘기다), 극장 내부에는 절반 좀 넘게 사람이 차 있었다. 영화 홍보는 조금 되었던 듯싶은데 입소문은 잘 안 탄 것 같다. 그나마 한핏줄 영화인 '국경의 남쪽' 보다는 좀 더 홍보가 된 것 같지만서도.... 인터넷에서는 '그다지 땡기지 않았는데 보고 나니 생각보다 좋았다'는 평이 많다.
"생각보다 좋았다" - 이 영화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한 마디가 아닌가 싶다. 엄마 손 붙잡고 깔깔거리며 온 아이와 그 친구들, 영화는 그저 핑계고 애인 얼굴 보러 온 커플들 등등, 영화에 대해 별 선입견 없이 들어왔으리라 짐작되는 관객들. 스탭롤 올라갈 때 뒤쪽을 돌아보니 그들 중 상당수가 훌쩍거리고 있었다. 나는 찡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뭔가 와닿아 착잡해지긴 했다. 자유북한방송 같은 곳에 올라오는 탈북민들의 아픈 증언들을 미리 읽어봤기 때문에 그보다는 '덜 독하다'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스토리는 그야말로 눈물 질질 짜는 신파극이다. 시나리오상의 완성도 자체는 '국경의 남쪽'보다도 낮다고 본다. - 아마 이것이 완전한 가상의 스토리라면 별점을 낮게 줬겠지만, 진실의 힘은 그것을 뒤집는다. 어딘가 올이 성기게 짜인 듯한 시퀀스와 영화적 장치임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배경(ex: 비) 등 그 모든 사소한 단점을 덮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관객을 영화 속 현실 안으로 강렬하게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북녘 땅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현실 중 하나이기 때문에. '내 아들이, 내 아내가...' 라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차인표의 연기는 그저 질질 짜는 신파로 남을 뿐이다.
김태균이라는 감독 이름 석 자가 눈에 익어서 한참 고민했지만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컬투에도 김태균이 있고, 현재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홈런을 많이 친 한화 야구선수 이름도 김태균이다. 결국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어느 새 내 기억 속에서는 잊혀져갔던 그 사람이다. 박봉곤 가출사건, 그리고 (개인적으로 화면에 펼쳐진 상상력 하나는 끝내준다고 생각했지만 신민아가 연기가 뻣뻣해서 안습이었던) 화산고. 그 영화에서 등장했던 꼬불꼬불한 수도파이프 같은 장치는 참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잊었다가 오늘에야 기억해 냈다. 어쩐지 화면 구성이나 연출 자체는 짜임새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그가 어느덧 중견감독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가리늦가 들었다. 스크린을 통해 신인감독과도 같은 열정이 느껴지지만, 영화 자체가 한두 편 만들어 본 솜씨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록 앞에 언급한 대로 시나리오 진행과 관련된 연출은 약간 성긴 면이 있긴 하지만 영화감상을 거스를 정도로 크게 신경쓸 부분은 아니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연출 면에서 특기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역시나 성수역에서 촬영한 전철 장면이다. 이건 나의 취향이 철도마니아인가 아닌가의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매우 인상적이다. 전철이 들어오는 소음과 전화를 받는 주인공, 그리고 주인공의 심적 충격 상태를 열차 정지 직후의 잠깐의 정적으로 멋지게 엮어넣은 후, 주인공의 멍한 상태와 전동차를 타고내리는 사람들을 한 컷 안에서 대비시킨다. 주인공의 심상과 현실이 괴리되는 순간을 10여초에 불과한 시간 사이에 참 치밀하게 엮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이런 식으로 잘 짜여진 듯한 시퀀스를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중 하나다.
또한 이 영화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배우들의 연기이다. 특히 아들 준이 역을 맡은 신명철군의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프라이멀 피어'에서 리차드 기어의 연기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혜성같이 떠오른 신예 에드워드 노튼에게 그야말로 '가려졌던' 그 때가 생각날 만큼, 신명철군의 연기는 차인표의 열연마저 무색케 할 정도로 몰입감이 있다. 주연인 차인표 또한 울음 연기의 인상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덜 인상적이지만 그 외의 부분의 표정은 정말로 탈북 노동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것은 클라이막스 씬을 보면 알 수 있다 - 내용누설 우려가 있어 자세히 언급할 수 없는 게 유감이지만.
그 외에도 어깨죽지에 살아 꿈틀거리는 구더기를 잔뜩 붙이고 열연했던 주다영(이 친구는 예전에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고 이은주씨의 어린 동생역으로 나왔던가?)양이나 기타 조연들도 좋은 연기력을 보여준다. 단지 너무 연기에 몰입한 나머지 사투리를 나조차도 간간이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점이 옥의 티다. (함남 사투리는 강원도 사투리랑 억양이 비슷해서, 경남 사람 입장에선 서울말보다 외려 고향말 두 다리 건너 친척뻘인 이북말이 알아듣기가 쉽다. 참고로 내 경험의 일부가 된 것은 탈북민 외에도 대학 때의 은사인 장경학 교수님. 1916년생. 저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고원군 바로 옆인 문천군 출신인데 아직도 살아계신다.)
적지 않은 제작비가 투입되었고 탈북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짜여졌기 때문인지, 이 영화의 미술은 함경남도 고원군의 탄광촌을 매우 잘 재현해냈고, 광대한 몽골의 자연과 호경기인 중국 거리의 분위기 등을 담아내어 영화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배경 자체보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심리상태에 따라 화면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효과적으로 쓰인 미장센을 더 비중있게 언급하고 싶다. 일례로 강제수용소 장면의 그 거칠거칠한 필름입자는 (분장의 효과도 있겠지만) 탄광 마을의 '가난하지만 정겨운' 생활과는 분명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지 이런 장점들에 비해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뭐랄까 시나리오상에서 각각의 시퀀스나 장치가 의도하는 것들 - 야구 식으로 말하자면 이 시나리오의 원작이 갖는 '포텐셜'을 전부 터뜨리지는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꼭 원작소설의 영화화 같은 느김이다. 그것은 영화가 워낙 스트레이트하게 진행되는 탓도 크지 않겠나 싶긴 하다. 헐리우드 드라마처럼 완급조절을 정석적으로 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이끌어가는데, 어쩌면 이 '실화'를 엮어내는 데에는 그 방법이 더 유용했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이해할 구석이 있기는 있지만, 어쨌든 그게 아쉽다.
다른 또 하나의 아쉬움은 음악. 매우 서정적인 기타 선율과 스트링은 분명 마음에 들고, 이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해 준다. 그러나 너무 뻔한 곳에서 깔아주는 것은, 외려 관객으로 하여금 '아, 신파구나' 하고 생각게 하는 것 같다. 차라리 선율의 주제가 마음에 울릴 정도로 강렬한 감동을 가져오는 (4도화음 7도화음의 난무.. 뉴에이지..) 거라면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어쿠스틱 기타는 그런 종류의 감동은 아니다. 스탭롤 올라갈 때 나오는 주제음악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지만. ('웰컴 투 동막골'이나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영화에서 쓰였던 오케스트라처럼.)
개인적으로는 안판석 감독 -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 듯하지만 그는 그 유명한 '하얀 거탑'의 PD이다. - 의 '국경의 남쪽'이 그 진정성이나 완성도 등에 비해 처절하게 실패한 것을 보고, 이 영화도 혹여 그렇지 않을까 우려된다. 곽경택 감독의 '태풍'은 뭐 언급할 가치도 없었고... ('쌈마이' 장면은 좀 즐겁긴 했다.) 어쩌면 이 탈북 관련 주제의 영화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흥행할 만한 아이템은 아닌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의 힘은 이 영화의 단점을 모두 덮고 장점을 더욱 부각시켜 주고 있다. 아주 하이랭크의 영화는 아니지만서도 - 이 영화는 적어도 당신의 선입견보다는 괜찮을 것 같다.
P.S.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성경은 그다지 중요한 아이콘이 아닌데 실제 현실의 경우는 더욱 잔인한 사례가 많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꽃제비들을 불러다 '좋은 책이다' - 마치 영화 초반부에서 주인공이 성경을 받아들듯 - 라고 포교하고, 걔들이 머리 굵어지면 '너희들은 하나님의 십자군이다' 라며 도로 월북시키는 사례가 있다. 물론 걸리면 공개처형이다. 그걸 알면서도 다시 두만강을 건너게 하는 것이다. 즉, 이 영화에서 나오는 진실이란 그조차도 꽤 많이 '순화된' 것들이 많다.
P.S.2
관련해서 사족 한 가지 더. 영화 중간에 "하나님은 부자 나라에만 있고 왜 북에는 약도 먹을 것도 갖고오시지 않습니까" 라는 내용으로, 차인표가 독실한 크리스천인 공장 주인(원로배우 이영후씨의 얼굴을 간만에 볼 수 있다)에게 절규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장성산 감독의 뮤지컬 "요덕 스토리"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보니 장성산 감독도 이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지 못해 7~8년을 헤메다녔는데, 단지 요즘 비난받는 모 신문의 후원이란 이유만으로 이 작품이 도매금으로 비난받는 경우를 가끔 본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 영화도 그런 선입견에 걸려들까 두렵다.
# by | 2008/06/28 22:16 | 뇌내세척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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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배우의 사투리 연기는 아무래도 경남 사투리와 차이를 모르겠더군요. [..]
확실히 아이들 연기는 좋았습니다. 어른들의 연기는 조금 이상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요.
아, 미리니름 없는 평을 보았을 때. 이게 오히려 미화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갔던 터라 감정이 크게 동하지 않아서 좀 안타까웠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보통 이런 커플들은 아메리칸 영화 상영장에 훨씬 더 많죠..
어떻게 배트맨 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되어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