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감.

어젯밤 집으로 정기교신(우리집 할마씨 살아계신가 우짜는가...)을 걸어보니 웬일로 집이 왁짜지껄하다. 그리고 모친은 대뜸 전화를 바꿔 주신다. 초율이다. 초율이는 누나의 둘째 아기인데 이제 막 돌 지났다. 응, 우응, 빠빠빠빠. 아직 말은 제대로 못 한다. 얘는 내가 지 삼촌이란 걸 알려나 몰라. 삼촌이야 삼촌- 해도 그냥 대놓고 아빠빠빠다. (전화기 저 편에서 자형이 껄껄 웃는 소리가 들린다.)

생각해보면 옛날에는 정말 '애' 라는 존재 자체를 무던히도 싫어했더랬다. 나 자신부터 어릴 때 엄청나게 별난 놈이었고 머리 굵어져서 옛날의 나를 떠올려보니 어머 부끄러워라.배고프면 울고, 달래줘 봐야 10분도 채 안 가고, 놔두면 벽에 낙서가 한가득, 한눈 잠깐 팔면 출담에서 떨어져 이마빡을 깨고, 호기심은 뭐그리 많은지 맨날 집에서 호작질이나 치대는 통에 집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고; 그런데 그런 사고뭉치가 이 나라에 몇백만이나 있단 말이지? 와아, 내 인생에는 좀 안 엮입시다이...

- 라던 것이, 미성이가 태어나고 모든 게 바뀌었다. 미성이는 초율이의 누나. 그러니까 우리 누나의 첫째다.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함함하다고 했던가. 저 때쯤부터 애기들이 귀여워지기 시작했다. 엉금엉금 하던 게 뒤뚱뒤뚱, 좀 지나니까 꼬까신 신고 아장아장. 둥기둥기 아가야 엄마 올 때까지 동구 밖에 나가 놀자. 시장 간 누나 돌아올 때까지 들쳐업은 조카의 체온이 어찌 그리도 따뜻하던지. 그렇게 정을 주어서인지 나중에 대여섯 살이 되어서도 미성이는 유독 나를 잘 따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일년에 한두 번 보기도 힘들다. 볼 때마다 키가 10센티는 넘게 자라 있고, 말 쓰는 솜씨가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걸 느낀다. '삼튠 므하는데'가 '삼촌 학교 언제 졸업해요?'(...) 로 바뀌는 과정은 (대화 내용은 좀 아스트랄하지만) 신비롭다.

원래 윤도현이 지 딸이랑 딥키스한다는 얘기를 좀 씹으려다가, 어떻게 자기 조카 자랑하는 팔불출 얘기로 빠졌다. (.....) 이왕 빠진 김에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사족을 붙여보자. 가끔 인터넷을 보면 여자들 블로그 중에 난 더 이상 남자를 못 믿어, 사랑 안 해, 뭐 이런 뜻의 얘기를 아주 감각적으로 써 놨다. 그걸 볼 때마다 나는 미성이가 생각이 난다. 내가 내 혈육을 안고서 내 안의 무언가가 바뀌었던 것처럼, 그 사람들도 좋은 사람 만나 마음의 문을 열게 되면 또 그 때는 달라질 거다. 이쯤 되면 여자의 no는 no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 잡설 끝.

by 홍월영 | 2008/06/23 15:34 | 잡담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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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택씨 at 2008/06/23 15:58
하하하.
이렇게 빨리 여자가 하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계시다니.....
Commented by 홍월영 at 2008/06/23 22:39
.... 그 한 가정의 가장되시는 분께 이런 얘기 들으면 칭찬인가요 아니면 아이구 귀여운거 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ㄷㄷ
Commented by 로무 at 2008/06/23 16:40
그래서 애 이뻐하는 남자가 매력적.
Commented by 홍월영 at 2008/06/23 22:40
그렇군요! (납득)
Commented by 백월 at 2008/06/23 16:47
ㅇㅇ 여자도 그렇고 남자도 그렇고 상대방 성별에 대해 굉장히 불신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뭐, 좋은 사람 만나면 다들 변하기 마련이죠. 그냥 '뭐 그래라 불쌍한 것들' 이러며 지켜봐주고 있음. (인연을 못 만났으니 불쌍한건 맞잖아요. 아니 뭐 그런 저도... 후우.)
Commented by 홍월영 at 2008/06/23 22:40
뭐 나중에 또 누구 사귀면 징징대던 거 뚝 그치고 또 막 닭살오오라를 풍기고 다니니까 말이에요(....)
Commented by 사은 at 2008/06/23 19:27
애 이뻐하는 남자는 매력적이란 로무님 말씀에 공감 백표요. 조카들은 참 신기한 존재에요. 자기 자식이란 건 상상하면 아스트랄해지잖아요. 조카는 뭔가 아기사랑 입문편같달까... 근데 원래 하시려던 이야기가 이렇게 된 것도 좋은데용?
Commented by 홍월영 at 2008/06/23 22:41
전 아마 제 자식이란 걸 평생 가봐야 못 얻을 것 같으니까요... 흐흐. 불장난도 불장난 나름. 스타히로의 오타쿠의 따님 같은 건 그저 만화일 뿐(....)
Commented by 양과알 at 2008/06/23 21:09
저도 애는 이뻐해도 저 애는 싫을 것 같은데 막상 안고나면 부정을 못하겠군요.
Commented by 홍월영 at 2008/06/23 22:43
자기 애- 라는 건 완전히 일단 생각 유보. 일단 하늘을 봐야 별을 따죠-_-
음, 만약 사내애면 한번 찌질마초가 아니라 제대로 모든 여자들이 숨넘어가는 마쵸맨으로 길러볼까 생각중입니다. (일단 기본으로 열살이 되기 전에 백두 금강 지리 한라 정복?!) 여자애면 모든 남자를 종으로 부리는 여왕으로 길러낼.... (퍽)
Commented by 에제키엘 at 2008/06/25 12:10
막내동생과 사촌 동생들 커 가는 것 보면, 아직 조카야 없지마는 정말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제대로 깨닫게 됩니다... 크흑, 새봄아!!!(<-21살 차이나는 새로 생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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