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에 관한 잡설.

지인의 블로그에 관련 주제가 잠깐 올라왔길래, 생각난 김에 적어본다.

지금은 기자로 뛰고 있는 한 대학 선배는 언론정보학과가 아닌 사학과, 그 중에서도 동양 근세사를 전공으로 하였다. 나는 선배의 대학원 졸업 논문을 옆에서 잠깐 도우며 그 내용을 읽을 기회가 있었고 (교수연구실이 우리 과 건물 위층에 있었기 때문에 싫든 좋든 엮이고 밥을 얻어먹었다. 쿨럭) 흥미롭게도 졸업논문의 주제는 청일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청일전쟁 자체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서도 희귀한 주제까지는 아니었지만, 선배의 연구는 약간 과장하여 말하면 종래의 상식을 뒤집을 만한 것이었다. 과장이 아니더라도, 주제 접근에 있어서 대단히 독특한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논문심사 당시 의견이 분분했다는 뒷얘기가 있다. (논문의 진정성에 관하여는, 그는 그 주제에 대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의 요코스카, 도쿄, 중국 화북, 동북(만주) 등을 수없이 답사하며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현지의 값진 자료를 입수하였고 끝내 결실을 맺었다.)


그 논문 중에서 내가 특히 기억하고 있는 부분은 청국 군함의 운용에 관한 부분이었다. 당시 청나라가 도입한 '정원'과 '진원'이라는 두 거함은 일본 해군의 전력에 비해 매우 우세한, 독일제 대형 갑철함(장갑함의 중국식 표현)이었다. 청일전쟁에 대해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대로 "근대화된 일본 해군에게 패했다" 정도의 피상적 견해를 갖고 있던 내게는, 청 군함이 일본 군함에 비해 압도적이었다는 사실이 꽤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북양함대가 나가사키에 입항했을 때 소요사태가 일어났다는 기록(이른바 '청국수병 폭동사건)도 있는데, 이 대목에서는 페리의 강제개항이 떠오를 정도다. 의외로 일본 해군은 전력상으로는 청나라와 힘겨운 싸움을 했던 것이다. 청나라라는 제국은 늙고 병들긴 했지만 거인은 거인이었다.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을 겪은 청나라는 양무 운동 등 근대화를 위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태평천국의 전력을 박살낸 청국의 두 주축인 증국번과 이홍장은 권력의 실세로서 여러 가지 근대적 시스템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개중에는 기존의 군제를 근대적 군대로 개편하는 문제도 있었다. 특히 이홍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북양함대'는 규모만으로는 아시아의 최강자라 불릴 만했다. 군사고문부터가 '세계 최강의 해군을 가진 나라'인 영국의 W.H.Lang이었고, 실제로 앞서 말한 정원, 진원 두 거함보다 큰 규모의 군함은 당시 세계를 통틀어서도 영국의 데바스테이션, 드레드노트 등 5척 정도에 불과했다.



청나라 북양함대의 주력함 정원(定遠), 1881년 진수.



그리고 그러한 강대한 해군을 건설하고자 한 청나라와 경쟁한 것이, 새롭게 떠오르는 해군 강국 일본이었다. 필연적으로 두 나라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충돌, 자웅을 가리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그 경쟁에서, 안타깝게도 이미 그 시점에서 30년 이상 뒤쳐져 있었다. 고종의 동북아 균형자론 운운은 이미 상큼하게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바대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근대화를 단행한, 그럼으로써 이미 1873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일본이었지만,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청나라에 비해 여러 모로 국력이 열세했다.

이는 당시 일본 내에서 전력증강에 대한 조세정책을 두고 격렬한 찬반양론이 벌어진 사실이 증명한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1890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의회정치는 이 문제를 두고 몇 달간 격론을 벌였다. (그 사건의 와중에 일어난 1891, 1892년의 두 번에 걸친 북양함대의 일본 공식 방문은 일본인들을 더욱 질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논의는 의외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메이지 텐노(흔히 천황이라 표기하는..)가 칙령을 내려 입을 다물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는 군비증강을 선택했고, 이것이 이른바 '건함칙어'이다. 이를테면 다이세이호칸(대정봉환: 막부로부터 권력이 텐노에게 이양된 사건)이후 서양의 '황제' 자리에 오른 메이지 텐노는 그 무소불위의 철권으로 국론을 강제봉합해버린 것이었다. (*당시 일본제국의 헌법은 엄밀히 말해 근대적인 헌정헌법이 아닌 절대왕정에 가까운 것이었고 이것이 194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1933년 교토제대 법대에서는 텐노의 법적 지위를 논하여 의견을 개진한 교수가 군부에 의해 쫓겨나는 사건이 있을 정도였는데, 이에 대하여는 이 블로그에서 다키가와 사건으로 검색해보기 바란다.)

그런데 당시 청나라에서는 일본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해군아문이 창설되고 강력한 위용의 북양함대가 갖추어졌지만, 1880년대 초중반의 기세와는 달리 18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청나라의 해군력은 답보상태에 있었다. 아니, 답보상태라기보다는 속으로 썩어들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그것은 해군아문 자체가 '서태후'의 사치를 위한 비자금 조달처로 변질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예산은 1/4 수준으로 감소하였고, 이는 전력의 증강은커녕 있는 전력을 유지, 보수하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국과 일본의 군사력 격돌 - 우리가 아는 그 청일전쟁 - 은 그 결과가 어느 정도 예상되는 것이었다.



일본해군의 기함 마츠시마. 1890년 진수.
위 그림의 정원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가 작음을 알 수 있다.



청일전쟁은 엉뚱하게도 조선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렸고, 당시 평양 근교 등에서 청군과 일본군이 교전을 벌였다.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 도입분이 바로 이 장면이다.) 육상의 일본군은 연전연승했으나, 이는 일본군의 화력보다는 청군이 워낙에 당나라 군대였기 때문라고 보는 편이 맞다. 한편 청군의 북양함대 또한 압록강 하구에서 일본 해군을 맞아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이 '황해 해전'이다. 청일전쟁에 와서는 이제 양군의 총 배수량을 놓고 볼 때 오히려 일본이 약간 상회하게 될 지경이었고, 대형 갑철함부터 프리깃함과 소형선박 등 난잡한 체계였던 청군과 달리 일본군은 중형함에 강력한 함포를 청군의 두 배 이상 구비한 잘 짜여진 정예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자랑하는 북양함대는 비록 그 위용이 빛을 바랬으나 완전히 이빨이 빠진 것은 아니었고, '괴물' 정원과 진원 두 거대 갑철함은 청국 수군의 작전상 삽질 (정여창 제독은 해전에 있어 기병식 전술을 사용했다) 중에서도 분전했다. 정원에서 발사된 함포는 일본군의 기함 마츠시마를 피격시켰고, 일본군은 이 전투로 인한 사망자의 1/3을 정원 단 한 대의 공격에 의해 잃었다. 전투가 일본 해군의 판정승으로 끝나고 일본이 전쟁의 승기를 잡는 와중에서도 "아직 가라앉지 않은 정원"은 여전히 일본해군의 치명적 위협이었던 것이다.

황해 해전은 대단히 격렬한 해상의 대회전이었지만, 이 해전으로 청일전쟁의 승부가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싱거운 결과라면 결과일 것인데, 결론적으로 북양함대는 일본 육군이 뤼순 항구를 점령함으로서 사실상 종결되게 되었다. 뤼순은 북양함대의 유일한 선박수리 도크가 있었던 곳이고, 이 곳을 점령당한 북양함대는 마침내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령관 정여창 제독은 이홍장에게 패전의 전보를 친 후 음독 자결하였고, 일본군은 정원을 끝내 해전에서 격침하지 못하고 뤼순 항구에서 자침시켜 버림으로서 그들의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청나라는 전쟁에서 패했고, 일본에게 2억 3150만냥을 배상금으로 지불하게 되었다. 이는 서태후가 전용한 300만냥의 10배에 이르는 금액이었고, 당시 일본 전체 세출액의 4.2배에 달했다. 논문에 인용된 일본인 학자의 말대로, 일본은 이 전쟁에 국력을 올인한 끝에 "전후경영과 군비확장 나아가 제국주의의 도정에 필요한 거대한 재원"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일본은 이 전쟁 이후에 러일전쟁에서도 이기고 조선을 잡아먹은 후 동아시아의 유일한 열강 반열에 올라서게 되다.

(*사족. 일본 역시 두 전쟁의 승리에 심취하여 제국주의자들로서의 오만에 빠져 있다가, 미국에게 처절하게 패하고 만다. 그들은 과달카날에서 1905년 당시의 돌격전술을 1942년에도 그대로 쓰다가 96.7%의 사상률이라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적당히 도망가주는" 중국군과는 달리 미군은 돌격해 오는 일본군에게 1차대전 때에 독일군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총소사를 퍼부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사실 "로또가 두 번 연속으로 터진" 것이었을 뿐임을 깨닫지 못했다. 아시아에 그들에 비교될 만한 강국이 없었기에, 그러한 착각은 매우 오래 갔던 것이다.)


당시 이 논문의 오자를 교열하며 강렬하게 느꼈던 것이 많았다. 우선 아무리 풍족한 환경과 넉넉한 기본이 갖추어져 있더라도 결국 모든 일은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 손에 달렸다는 점. 강대했던 청나라의 수군도 '허리가 강한' 일본군에게 패했고, 일본도 뤼순을 함락시키고 러시아를 격퇴했던 '돌격전술'을 미군에게 써먹다가 결국 '가미카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청나라가 망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내부로부터의 적' - 서태후의 사치로 인한 금권의 유용 - 이었다는 점. 그들은 약해빠진 존재는 아니었다. 다만 그 "한 끗" 차이에서 상대에게 뒤졌고, 결국은 나라마저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중국 대륙에 피의 내홍이 사라진 것은 1980년대 초의 일이다.)

역사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우리의 모습을 새삼 뒤돌아보게 된다. 여기에 붙여 쓰고 싶은 내 주장은 많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보다는 온고이지신의 방법으로서 옛 사실을 알면 새로운 생각이 생겨난다는 진리에 그저 일말의 기대와 희망을 걸어볼 뿐이다.

by 홍월영 | 2008/05/17 09:02 | 단상 | 트랙백(2)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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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My Starlight.. at 2008/05/17 09:58

제목 : '청일전쟁에 관한 잡설'에 대한 잡설..
[관련글] 청일전쟁에 관한 잡설. (by 홍월영) 1. '갑철(甲鐵)'은 장갑(裝甲)의 중국식 표현은 아니고 일본식 표현입니다... 메이지 유신 후에 일본이 최초로 도입한 장갑함이 바로 '코테츠(갑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요. 일본 최초의 장갑함이라는 타이틀 덕분이라 그런지 그 후 상당기간 일본에서의 장갑함의 대명사는 '코테츠'가 됩니다. 일본 최초의 장갑함, 코테츠의 모습입니다. 2. 그리고 중간에 정여창제독의 삽질에서......more

Tracked from 뽀도르님의 이글루 at 2008/05/17 12:42

제목 : 청일전쟁 일본의 승인...
청일전쟁에 관한 잡설. 예전에 일본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인가에서도 황해 해전 대목을 읽은 거 같은데 청나라 해군의 훈련 수준이 일본에 비해 많이 열세였다고 나옵니다. 그건 소설일뿐이지만 다른 문헌을 봐도 청일, 러일 전쟁의 승인의 하나가 일본이 당시에도 거의 문맹이 없을 정도로 전반적 교육 수준이 높았던 게 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러일 전쟁 시 농노 출신이 대부분인 러시아 사병들의 일제 사격이 일본군의 머리 위를 지나기 일......more

Commented by Mizar at 2008/05/17 10:01
덧글 달다가 너무 길어셔저 포스트로 트랙백을 보냅니다..^^
Commented by blus at 2008/05/17 10:30
글 너무 재밌게 보았습니다. ;ㅂ;/
글을 읽는 와중에 함포를 펑펑 쏘아대는 정원의 위용이 보이는 듯 했어요.^^
Commented by verisimo at 2008/05/17 10:30
..정원 진원... 아, 즐겁게 영화보고 산책하다가 부랴부랴 돌아와야 했던 그 날이 기억나는근여[...]
Commented by 琳☆ at 2008/05/17 11:38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즐겁군요 ^^
Commented by 불멸사학도 at 2008/05/17 11:53
이홍장이 북양함대를 키우기 위해 사실상 본거지 밖에 주둔하는 복건 남양함대에 대해서는 거의 투자도 안 하고, 청불전쟁때 두 함대가 괴멸되는 걸 방관했는데, 그렇게 해서 소중하게 키워놓은 북양함대의 종말이 꽤나 허무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고보니 뤼순에 갖혀서 궤멸당한 건 청군이 아니라 러일전쟁때 러시아군이 아니었나요? 청군은 산둥반도를 가로질러서 육상으로 침투한 일본군에 의해서 웨이하이웨이(미자르님 트랙백에 나온 것 처럼 말이죠...)에서 끝장난 것 같았는데요...

서태후의 공금 유용으로 인한 중국의 기구한 운명도 운명이지만, 일본도 역시 그때 이후 시작된 식민주의 정책의 폭주가 결국엔 원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개항 이후 첫 대규모 대외전쟁에서 생각지도 못한 막대한 배상금과 식민지에 맛들려서(삼국간섭으로 땅은 대부분 되돌려줬지만 말이죠...) 러일전쟁, 한일합방,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까지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군부가 권력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였겠죠...

그건 그렇고, 제가 전사(戰史)쪽엔 좀 약한 편이어서 청일전쟁의 디테일한 면은 잘 몰랐었는데, 그중 북양함대의 운명과 관련된 해전쪽에 대해 자세하게 포스팅해주셔서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Commented by 카방글 at 2008/05/17 14:24
임진왜란 때 원균이 생각나네요
Commented by 유배행성 at 2008/05/17 16:37
예전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그린 <宮崎駿の雑想ノート>라는 화보집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가 옛날 군함이나 비행기, 전차들을 그린 화보집이었는데,
본문에 언급하신 "1891, 1892년의 두 번에 걸친 북양함대의 일본 공식 방문은 일본인들을 더욱 질겁하게 만들었다"에 해당하는 그림을 본 것 같습니다.
지금 그 책이 없어 다시 확인을 못하지만, 제 기억으론 일본을 방문한 중국함대에 일본인들이 놀라는 그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xmamx at 2008/05/17 16:59
서태후가 빼돌린 돈들은 이화원을 짇는데 들어갔다는...

마실 물조차 귀한 북경지방에서... 커다란 호수를 파고 정원을 꾸미는 사치를 보여주었죠.

결과는 포탄이 없는 포...

지도층은 중요함이 다시끔...
Commented by 홍월영 at 2008/05/17 17:21
불멸사학도// Mizar님의 트랙백 쪽 댓글에도 달았지만, 아무래도 해당 논문이 제 수중에 있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요약만 대충 들어있다 보니 여기저기서 DB가 꼬이는 것 같습니다. 트랙백과 댓글로 지적해 주신 게 맞겠지요. 저는 아무래도 전공이 아닌 잡지식 수준에 불과하니...
Commented by 레인보우 at 2008/05/17 22:51
결국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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