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평양공연.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동평양대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식당에 앉아서 그 광경을 TV로 지켜보았다. 시험을 하루 남겨두고 온 동네 전체에서 시꺼먼 아우라가 풍기는 게 도무지 그 다크포스를 견딜 수가 없어서 오늘 저녁은 좀 쉬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보다도 이런 빅 이벤트를 솔직히 '비디오 키드'로서 놓치고 싶지 않단 마음도, 저으기 있다.

TV의 화면은 HD신호가 없는 화면이었고 좌우를 잘라낸 것 같아 그림이 좀 답답해 보였다. 생각건대 신호가 HD-비HD 동시대응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DVD나 HD소스 등으로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만약 저게 원래 화면구성이면 좀 안타까운 일이다. 저 좋은 극장시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니 아쉽지 않을까. (반사판을 설치한 걸로 보아 음향시설은 그저 그런 것 같지만, 동평양 대극장의 규모 자체는 매우 화려하고 웅장하다)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는 그 명성에 걸맞게 매우 감동적이었다. 식당의 그저 그런 브라운관 TV로 보아도 그 감동은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참 격세지감이다. 옛날에는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도 구분을 못했던 막귀도 한 10년 듣다 보면 좋고 나쁘다, 예 아니오 정도는 구분이 되는 모양이다. 다만 북한측 여성 사회자의 목소리가 참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옥구슬 굴러가는 듯하고 나쁘게 말하면 부드러움이 지나치다. 같은 말을 쓰더라도 남과 북의 스타일 차이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북한의 보통 말투가 아닌 방송, 영화용 말투는 어르신들이 쓰는 옛 서울말 억양을 매우 닮아 있다.

언론들은 대부분 "미국 국가가 북한에 공식적으로 연주된 것"에 포커스를 맞추지만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북한 국가가 대한민국의 통치력이 미치는 국토에 공식적으로는 최초로 방송된 것"이란 의미가 매우 크다. 지금도 국가보안법 찬양고무죄에 직접 저촉되는 사안인데 그 의미가 이제 실질적으로 사문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공연은 그 음악적 탁월함에 대한 부분 외에도 대단히 정치적, 외교적 의미를 크게 지니고 있다.

이 공연이 과연 장 미셀 자르의 1981년 중국 공연처럼 세계 외교사에 기념비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고민해봤다.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다. 덩 샤오핑이 자르의 일렉트로니카와 전위예술을 이용해 죽(竹)의 장막을 본격적으로 열어젖힘을 세계에 알렸듯, 예술에 관심이 많은 김정일의 아들들(한 명은 오덕이지만.. 쿨럭)이 똑같은 방법을 이용하여 체제의 변화를 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북한 내의 권력구도 변화에 대하여는 이런저런 뜬소문이 많은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 공연으로 인한 이런저런 일반적 기대가 그대로 성사된다면, 그것은 북한 외교력의 승리일 것이다. 건국 이래 대한민국의 전통적인 입장으로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것이었고, 그것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및 UN 동시가입에 의해 입장에 변화가 있을 때까지 그 기조가 유지되어 왔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시절, 그는 북한과 미국 사이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대한민국이 이를테면 인터페이스로 기능하는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사고관을 확장시킨 개념이 이른바 노무현의 동북아 균형자론일 것이다. (물론 국제 사회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반면 북한은 애초에 남측을 미국의 괴뢰정부로 보는 입장이어서 계속 북미간 직접대화만을 고집해왔다. 6자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6자회담 자체가 동서독 통일 때 당사자 및 연합군 4개국 해서 2+4 회담을 본뜬 것이다. 우리가 패전국이었던가?) 이 공연은 이제 북한과 미국이 1983년 이후 24년간 지리하게 벌여오던 치킨레이스에서 북한이 - 100만 명의 목숨을 희생양으로 하여 - 미국을 누르고 마침내 자신의 말빨을 국제사회에 먹인 신호탄이 될 것이라 본다.

그리고 이제 남북관계에서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은 웃기게도 제3자의 포지션에 서 있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두고 우익 노친네들은 거품을 물겠지만 (대한민국의 한반도 내 유일 합법정부 주장이 실질적으로 부정당하는 순간이니까...) 나로서는 그다지 우려도 오버도 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저 이 역사적인 순간을 즐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중에 통일을 하든 따로 떨어져 살든, 서로 왕래를 할 수 있고 적대시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이러한 개방의 결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이 더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다면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북한 인권에 대하여 그렇게 주장해왔듯... (어차피 한미동맹에 대한 사안은 당사자들의 노력에 따라 이것과는 별개로 될 수도 있다.)

단지 앞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한반도를 그린 그림이 아니라 철원 이남의 반도 남부를 그린 지도로 대표될 것임은 자명하다. 오늘 공연은 그러한 역학관계의 재편이 되는 제1탄이 "될 수도 있다."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오버하지 말라고 태클을 걸었던 것은 그 떄문일 것이다.)

by 스칼렛 | 2008/02/26 22:17 | 뇌내세척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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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일본 IT랑 관계없는 .. at 2008/02/28 10:11

제목 : 일본판 조선일보는 다른 신문과 뭔가 다르다..
팩트, 일어난 사건, 사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력 있는 교향악단인 뉴욕 필 오케스트라가 역사상 처음 평양 공연을 함. 일본내 각 언론의 해석; NYフィル平壌公演 日本人演奏者、複雑な思い 朝日新聞 뉴욕필 평양공연 일본인 멤버, 복잡한 심경 --- 아사히신문 「和解の始まり」と生中継の韓国テレビ MSN産経ニュース "평화와 해결의 시작", 생중계하는 한국TV ---산케이신문 NYフィル平壌公演は日本人女性が支えた MSN産経ニュース 뉴욕필 평양공연은 일본 ......more

Commented by ZOON at 2008/02/27 00:54
어찌보면 정세가 참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해석이 되는군요;;
전 가끔 6자회담 이야기를 들으면 북한과 미국이 대화하는데 한국이 어떻게든 끼어들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Commented by 택씨 at 2008/02/27 08:52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보니 북한주민들은 그 이후의 통제에 대해 더 귀챦아 하는 것으로 기사가 나와있더군요.
지난 번 대통령 방문 후에도 엄청난 통제를 했다고 하며, 이번에도 동일한 방법을 쓸 거라고 예측을 하고 있어서....
Commented by 暗雲姬 at 2008/02/27 09:10
관람자들이 껌을 씹고 있는 모습이...기억에 남습디다.
미제국주의자가 남긴 것이라고 껌 씹는 것 막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야말로 옛말이 되었는지, 연주회장에서 껌을 씹으며 감상하는...
Commented by 백색마약 at 2008/02/27 14:24
카더라 수준이긴 하지만, 북한과 미국이 힘 합쳐 중국을 견제한다는 소리도 들은거 같습니다.
Commented by 스칼렛 at 2008/02/27 19:56
ZOON// 제 글도 그런 맥락에서 쓰여졌습니다. 그간은 어떻게든 끼여들어서 주도권을 확보해 보려고 했지만 노통은 이 와중에 패를 다 까버렸죠. 그러니 게임이 성립이 될리가(....) 이제는 뭐 닥치고 봉 노릇 ㄳ 인데 앞으로 어떻게 될까 모르겠습니다. 얻는 것 없이 돈만 갖다바칠 듯.
택씨// 북한도 탈북민들 얘기 들어보면 엄청 요지경이죠...;;
暗雲姬// 북한도 뭔가 바뀌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암암리에 남쪽의 음반이나 비디오가 유통된다고도 하구요.... 사실 팝, 특히 락은 노동자들이 모여서 한데 어울려 듣던 저항의 음악인데, 그들이 금지시키는 건 - 아마도 스스로들이 파쇼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랄까; 그렇죠.
백색마약// 차라리 그래주면 한숨 돌릴 텐데 말이죠. 그렇다면 북한은 아마 김씨 왕조에서 현 중국같은 집단지도체제가 될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Commented by 海月 at 2008/02/27 21:18
북한... 여기서 얻어먹고 저기서 얻어먹고. 이러나 저러나 해도 실속 하나는 잘 챙기는 것 같아요. 그에 비하면 우리는...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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