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쿠!왕자님을 보다가 세로쓰기에 대해 생각하다

최근 지인들의 이글루를 보면 여성향 동인게임 '어이쿠! 왕자님'의 플레이 리뷰가 많이 올라오고 있다. 아마도 프린세스 메이커의 여성취향판(?) 인 듯하다. 게임 자체는 재미있어 보이긴 하는데 오늘은 그 게임 얘기가 아니라 사실 그 게임 겉포장에서 생각의 실마리를 잡은 전혀 엉뚱한 분야의 얘기를 할까 한다.

리뷰를 작성한 블로거들의 포스팅을 보고 있으면, 구매한 게임의 겉포장을 촬영해서 올려놓은 경우가 있다. (구매했으면 인증샷을! <- 서태지 한정반 때 나도 그랬음.) 그러한 사진을 들여다본 후 나는 제작사가 '대인배들' 이라는 포쓰넘치는 이름의 제작집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그 인증샷 사진을 보았을 때 개인적으로는 잠깐 위화감을 느꼈는데... 아니, 위화감이라기보다는 '잠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대인배들'이라는 제작사 표기는 도장으로 새긴 듯한 디자인으로, 네모 박스를 쳐서 네 글자를 박아놓았는데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대배
인들

..... 나는 처음에 이걸 '배들대인'로 읽어버렸던 것이다. (......)

'배들대인? 대배인들? .... 아! '대인배들'이라고 써놓은 거구나. 헐 이름부터 대인배야... 덜덜'

노파심에 미리 써놓지만 나는 저 탁월해보이는 창작집단에 대해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의욕을 꺾고자 하는 의도도 없다. 오히려 이런 대박작품이 터져줘서 쌍수들고 만세부르고 싶다. 가뜩이나 서브컬처계의 창작물, 특히 패키지 게임은 씨가 마른지가 옛날인데 하나라도 더 나와주면 땡큐지요. 아니 애초에 이 포스팅은 게임비판 관련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되었거나 저 세로쓰기가 좀 이상한 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저 경우는 글자 자체는 세로쓰기를 했는데, 문장의 진행 방향이 오른쪽에서 왼쪽이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꼭 표준어는 '오뚝이'가 맞지만 카레로 유명한 모 회사 상표는 그게 아닌 것과 비슷한 경우다.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헷갈려하고 2000년 수능 언어영역에도 출제되었던 문제. 히히히) 그러니까 말인즉슨

배대
들인

혹은

대인
배들

이렇게 써야 맞다는 얘기다. 원래는 세로쓰기가 원칙이지만, 후자의 경우 대통령이 쓰는 대한민국 국새 문양도 저렇게 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가로쓰기로 해도 별로 상관없는 것 같다.


실은 저 표기를 살펴보다가 고등학교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 때는 인터넷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고, 웹 게시판은커녕 PC통신을 이용하던 학생은 전교생 3천명 중 30명이 될까말까하던 시절이었다. 그 대신 꼭 대학교 동아리방에 있는 '날적이'마냥, 친구 사이에 돌려 쓰던 게시판 비스무리한 공책이 있었다.

우리들은 거기에 마여고 몇학년 몇반 엄양이 예쁘더라라는 얘기부터(그는 국어교사 엄선생의 딸이었다...;;) '덴버 선생 짜증나서 확 패버리고 싶다'는 강도높은 비난까지 별의별 얘기를 다 써놓았다. 나중에는 형이하학적 낙서(남녀 성기를 기호학적으로 재해석...쿨럭)와 '강박사' 강성복의 초현실주의 소설까지 튀어나왔다. (강박사는 아직도 소설 쓴다. 10년 전에 비해 더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아마 니체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놈은 여전히 퇴고따위는 하지 않으며 관념적이고 불친절한 스토리텔링을 한다.)

좌우지간 하루는 어느 놈이 좀 튀어보이려고 그랬는지 세로쓰기로 수필 비슷해보이는 잡글을 적어놓았다. 나는 이 경우에도 읽을 수 없었다. - "이거 대체 뭐라카는 기고?" - 이 녀석도 그 긴 문장을 죄다 왼쪽에서 오른쪽 진행방향의 세로쓰기로 적어놓은 것이다. 이걸 틀렸다고 지적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다가 그 때는 그냥 그만둬버렸다. 괜히 잘난척으로 보일까 걱정되어서였다. 지딴에는 몇 시간동안 명문이랍시고 끙끙대며 적어놓은 걸 텐데(.....)

단지 10년 전의 일이나 이번에 본 사진들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문화의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세로쓰기에 대한 것은 이제 민중들로부터 천천히 잊혀져가고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사라져가는 전통이 이거 말고 또 얼마나 많겠느냐마는, 이러한 소소한 것 하나에서도 얼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뭐가 옳은지는 모르겠고 어떻게 쓰든 공식적 석상에서의 글만 아니라면 쓰는 사람 마음이다. 세로쓰기를 왼쪽으로 진행하든 오른쪽으로 진행하든 풍습은 시대에 따라 바뀌게 마련이고, 최현배 선생이 가로쓰기를 처음 들여왔을 때에도 반발이 있었을 테니까. 어쨌든 그 때로부터 60년, 이제는 세로쓰기의 전통적인 방법 자체가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나는 세월 또한 느리지만 천천히 바뀌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by 스칼렛 | 2008/02/21 06:39 | 단상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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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quentin at 2008/02/21 09:08
서예작품 경우에도 간간히 왼쪽->오른쪽 진행을 따르는 경우도 있는 것 같더라고. 형식 자체에 뭔가 뜻이 있는게 아니라면 이렇게 바뀌어 가는 것도 별로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좀 씁쓸하네. 안타깝달까;
Commented by Belphegor at 2008/02/21 09:09
졸업문집 사건이 떠오르는군(버엉)
Commented by 烏有 at 2008/02/21 09:13
저도 구입자중 하나입니다만 배들대인으로 무심코 읽어버렸지요-ㅅ-;;;;;;;
Commented by 마나™ at 2008/02/21 10:08
이상한게아니라 그냥 틀린거지..... 그렇지만 세로쓰기 자체가 없어지는 판이니까 딱히 뭐라고 하기는 그렇네.
Commented by 한양댁 at 2008/02/21 10:16
세로쓰기로 인쇄된 책들을 읽은 기억이 선명한 세대(...으아아아~~!!!!!!! '우리 세대가 오래된 게 아니라 고모랑 삼촌이 읽던 옛날 책들이 집에 있던 것뿐이었어요오...'하는 변명이 튀어나오는구만요. 흠흠...)로서, 세로쓰기만의 멋이 사라지는 건 좀 안타깝네요.
Commented by 死海文書 at 2008/02/21 12:07
우종서 체계 자체가 나쁠 건 없다고 하는데 좌횡서 방식이 이제 대세를 타 버렸으니 '무릇 줄이란 것은 오른쪽으로 가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배들대인으로 읽었지만...
Commented by 스킬 at 2008/02/21 12:31
음..... 우종서체에 익숙한 제가 좀 이상한가 보군요.
전 바로 대인배들이라고 읽어버렸거든요. -_-;;;
Commented by 나츠메 at 2008/02/21 13:17
스칼렛님/
개인적으로는 우종서체가 나름 운치 있고 좋습니다. 그나저나 스칼렛님도 여성향의 길을 걷고자 하시는 건가요? ㅋ 축하(?)드립니다. 저랑 같이 <왕자님>게임해요.
Commented by 카방글 at 2008/02/21 13:34
전 저걸 배틀대인 으로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스칼렛 at 2008/02/21 15:21
quentin// 정말? 세로쓰기인데 좌->우로 나가는 게 있어?
Belphegor// 아 그 문집. 강박사하고 남경우하고 둘이서 아주 초현실주의의 잔치를 벌였던 그거 말이냐 ㄲㄲ 근데 졸업문집 사건은 뭐냐? 어째 나보다 더 희한한 걸 많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烏有// 저도 그러합니다.(....)
마나// 어 말이야 맞는말이지.
한양댁// 뭘요 저도 장준하의 돌배게를 읽고 자랐..(.....)
死海文書, 스킬// 그러니까 세로쓰기 중에 좌->우 태크를 타는 게 있긴 있나요; 우종서는 아예 방향이 우->좌가 아니면 틀린 걸로 아는데요...;;
나츠메//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카방글// 배틀(....)
Commented by 흑염패아르 at 2008/02/21 17:44
난 아직...우->좌 로 읽는구나 ;;; 그러고보니 중학교때까지? 고등학교땐가..까지만 해도 신문은 세로배열이었던거 같은데..
Commented by ZOON at 2008/02/21 22:03
세로쓰기 책은 읽기가 어려워서;;;
그러고보면 어릴때 세로쓰기 신문은 읽은 기억이 좀 있는듯한 없는듯한;;
Commented by 스칼렛 at 2008/02/22 05:06
아르// 응 우리 중3때까지 세로배열이었지.
ZOON// 전 NIE인가 뭔가 그거 시험교육 받은 적 있어서 중학교 때 신문 엄청 읽었더랬습니다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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