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민군 도끼 만행 사건


글: 제임스 리 (한국명 李文恒), 유엔군사령부 정전위원회 수석대표 특별고문(1968~1994)
게재: 新東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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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년 도끼만행사건 전말

이번 호에서 중점 거론하려고 하는 일촉즉발의 위기는 76년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다. 가장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그리고 가장 첨예하게 북한과 미국이 대립한 사건이어서 그 시기 어느 순간 서로 오판했을 경우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던 위기였다. 미군 장교 2명이 도끼로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사건 경위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설명이 없었던 것같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건을 처음부터 재구성했다.

판문점 회의장 서쪽 끝 언덕 위에는 유엔사 제5 관측소가 있다. 여기서는 북한측이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으로 들어오는 통로인 사천강 (泗川江) 위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그 다리 앞에 설치된 유엔사 제 3 초소가 한눈에 보인다. 처음 이 5 관측소를 지었을 때 북한측은 자신들이 노출된다고 생각했는지 「도발적인 시설」이라고 항의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3 과 5 관측소 사이에 미루나무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 5 관측소의 시야를 가렸다. 76 년 8 월 6 일 유엔사 전방 지원부대 작업반의 지시에 따라 한국근로부대 (KSC) 소속 근로자 4 명이 경호원들 과 함께 그 미루나무를 베러 들어갔다가 북한측 경비병들의 협박에 쫓겨나왔다. 유엔사 전방 지원부대는 북한 측의 반발을 고려해 줄기 대신 가지만 치기로 하고, 8 월 18 일 오전 10 시 30 분 경 유엔사 경비대장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 그리고 한국군 대위 한 명이 경비원 7 명과 KSC 근로자 5 명을 데리고 현장에 들어갔다.

가지치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북한군 경비장교 2명과 경비병 9명이 트럭을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북한측은 무슨 공사를 하고 있느냐고 물어 가지치기 작업이라는 설명을 듣고 『좋다』면서 현장을 떠나지 않고 지켜봤다.

작업이 15 분 쯤 더 진행됐을까, 북한 경비병들이 한국 근로자들에게 『이 가지는 치고 저 가지는 안된다』는 식의 참견을 시작했고, 이윽고 북한장교 한 명이 유엔사 장교에게 작업 중지를 요구했다. 이 북한장교는 『나뭇가지를 더 자르면 큰 문제가 생긴다』고 시비를 걸었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북한군 장교는 한국 근로자들에게 작업을 그만두라고 소리쳐 겁에 질린 근로자들이 작업을 중단했다.

화가 난 보니파스 대위가 근로자들에게 작업을 계속하라고 독려하는 동안 박철 중위로 나중에 밝혀진 이 북한군 장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으로 경비병 한 명을 보내 더 많은 경비병을 데리고 왔다. 북한군 경비병 수는 이제 30 명. 박철 중위는 시계를 풀어서 손수건에 정성스럽게 싸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갑자기 『죽여』라는 외마디와 함께 단번에 보니파스 대위를 때려눕혔다. 그러자 북한 경비병 5명이 일제히 합세, 보니파스 대위를 짓밟았다. 이들은 한국 근로자들이 버리고 달아난 도끼를 집어들어 도끼 뒷머리로 얼굴을 여러 차례 찍었다. 다음은 바레트 중위 차례였다. 바레트 중위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중에 유엔군 3 초소 동쪽 50 m 지점 도로 변 숲속에서 발견됐으나 역시 얼굴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맞아 보니파스 대위와 함께 서울로 후송하는 헬기 안에서 순직했다. 이밖에 미 경비병 4명과 한국 경비병 2명도 부상을 당했다.

이들은 판문점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싸우다가 죽었다. 유엔군측이 무력하게 당한 것은 경비대장인 보 니파스 대위가 제일 먼저 당하고 쓰러져 나머지 경비병들을 지휘할 사람이 없었고, 싸움이 순식간에 벌어져서 3, 4분만에 끝나 6백m 밖에 대기중이던 기동타격대가 출동할 때를 놓쳤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나기 하루 전 날 보니파스 대위는 내게 『요새 북한 경비병들이 전보다 많이 조용해졌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북한 경비병들이 조용해질 이유가 특별히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럴수록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일러줬는데, 하루만에 이와 같이 처참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좌로부터) 살해당한 유엔사 산하 미군 Arthur G. Bonifas 대위, Mark Barrett 중위, 그리고 사건의 주동자인 인민군 박철 중위



스틸웰 대장, 전투기 타고 급거 귀국

사건이 벌어진 뒤 15분 만에, 북한측은 그로부터 40분 뒤인 그 날 정오에 사건 현장에서 쌍방 경비장교 회의를 하자고 전통문을 보내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경비장교 회의에 나갈 경비 책임장교 보니파스 대위를 살해하고서 경비장교 회의를 갖자니…. 마침 전통문은 그의 시체가 판문점에서 후송돼 전방 지원부대에 도착했을 때에 맞춰 전달돼 더 큰 분노를 샀다.

더구나 이처럼 전례없이 큰 사건, 그것도 정전협정의 심장부인 판문점 회담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대위들 간의 경비장교 회의로 마무리지으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엔사가 이에 응할 리 만무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유엔군사령관 리차드 스틸웰 육군대장은 일본에 휴가를 가고 없었다. 그는 이 사건을 통보받자 얼마나 급했던지 여객기 대신 전투기 뒷자리에 타고 돌아왔다.

그의 사령관 사무실에서 지휘부서요원 회의가 소집됐다. 유엔사 부사령관, 참모장, 부참모장, 각 참모부장, 군정위 수석대표, 군정위 비서장, 그리고 필자가 회의 멤버였다. 당시는 한미연합사가 창설되기 전이어서 이 자리에 한국군은 한 명도 없었다. 스틸웰 장군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자기 책상 앞을 왔다갔다하면서 착석한 참모들에게 소리쳤다.

『우리 젊은 장교 두 사람이 놈들한테 살해됐다. 빌어먹을, 그놈의 나무를 잘라 버려야 겠어.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나한테 말들 해봐』

참모들은 사태의 심각성에 짓눌린 듯 선뜻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 시간 만 흘러갔다. 스틸웰 사령관은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사령관에 부임하기 전 미 육군 작전 참모부장을 지낸 작전통. 필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제임스 리, 만일 우리가 국제 보도진 과 중립국 감독 위원회의 스위스, 스웨덴 장교들을 데리고 들어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 근로자들로 하여금 미루나무를 자르게 하면 어떨까』

갑자기 다른 고위 장성들을 놔두고 내게 의견을 구하자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사령관이 내게 묻는 것은 북한측이 어떻게 나올지를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아 먼저 『사령관님께서 물으시기에 대답합니다만』이라는 서두와 함께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 같으면 한국 노무자들을 다시 들여보내지 않겠습니다. 제가 북한 책임자라면 국제 보도진이 동행하든, 중립국 감독위원회 장교들이 같이 가든, 미루나무 앞에 북한 경비병들로 진을 치고 한국 노무자들의 접근을 막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협박할 겁니다. 노무자들이 무슨 책임이나 힘이 있습니까. 전과 같이 도망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실패하고 망신만 당하게 됩니다. 만일 그 미루나무를 꼭 베어야 한다면 헌신적인 공병대원들과 그들을 호위하는 군인들을 들여보내야 할 겁니다』

스틸웰 사령관은 무엇인가 노트에 적고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서 상의할 것이며 데프콘 3 에 돌입해야 겠다는 말을 끝으로 지휘 부서요원 회의는 끝났다. 그후 각 참모들은 분주하게 돌아갔다. 사령관 사무실에서 나오는 길에 회의 중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참모 한두 사람이 『데프콘 3 은 전쟁일보 전까지 사태를 끌고 가는 것』이라며 걱정했다.


당시 사건을 기록한 사진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그림



기가 막힌 적반하장

스틸웰 사령관은 그 날 워싱턴에서 열리고 있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NSC) 에 그의 결심을 보고해 재가를 얻어냈다. 데프콘 3 에 의거,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75 대의 전폭기를 싣고 일본을 떠나 동해로 발진하는 동시에 오키나와에서 40 대로 구성된 미 공군 전폭기 2 개 전대가 한국으로 이동했다. 핵폭탄을 적재할 수 있는 F1 11 전폭기가 미 본토 아이다호에서 한국으로 향했고, B 52 폭격기도 그 뒤를 따랐다.

한국에서는 8·18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으로 부르지만 미국은 「나무자르기 사건 (Tree Cutting Incidents)」이라고 부른다. 나무를 자르다가 사건이 빚어졌고 나무를 자르면서 사건을 매듭지으려 했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 베는 것을 엄호하기 위해 항공모함 과 핵폭탄 적재가 가능한 전폭기가 출격하는 무력 집중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물론 나무베기는 앞으로 유엔사 경비부대의 안전과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에서 유엔군의 권위를 회복, 유지하려는 의지의 상징이었다.

북한측은 이와 같은 유엔사 내부의 결정 과 실행에 대해서는 모른 채 계속 쌍방 경비장교 회의를 고집했다. 유엔사측은 사안의 심각성에 비춰 군사 정전위 전체회의를 소집하자고 했지만 북한측은 쌍방 경비장교 회의 참가 전에는 군정위 본회의에 응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8 월 18 일 밤 유엔사 수석대표는 조선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에게 보내는 유엔군 사령관의 메시지라며 군정위 본회의를 더이상 지연시킬 수 없음을 통보했다.

결국 양측은 19 일 오후 4 시 쌍방 경비장교 회의와 군사정전위 본회의를 동시에 개최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어제 공동 경비구역에서 조선 인민군 경비부대 인원들은 유엔사 경비부대 인원들에게 가혹한 적대행위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조선 인민군의 호전적이며 극악한 행위로 유엔사 경비장교 두 명의 죽음을 가져왔다. 이 사건은 군사 정전 위원회의 구성 자체를 위태롭게 했을 뿐 아니라 쌍방이 1953 년 7 월에 합의한 공동 경비구역의 중립성을 위배하고 정전협정에 관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관례 와 규약을 위반하는 행위다. 휴전에 정식으로 서명한 이래 과거 23 년동안 전혀 없었던 공 동경비구역 경비 인원들의 공공연한 무자비한 살인사건은 계획되지 않은 우발적 언쟁으로 빚어진 사건은 아니다. (중략) 본인은 당신이 앞으로는 이런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담보를 할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이것은 유엔군 사령관이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며 군정위 수석대표가 대독한 내용. 이와 함께 사건 당시 촬영한 사진들을 증거로 제시했다. 다음은 북한측의 이 사건에 대한 인식과 설명.

『유엔사 작업인원 몇 명이 경비병 10 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도로 옆에 서 있는 그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우리 경비병 4 명이 그 곳에 가서 그 나무는 우리가 심고 기른 것으로 도로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라며 약 30 분 동안 자르지 말라고 설득했었다. 그리고 반드시 잘라야 한다면 북한측 과 상의해서 합의를 본 다음에 해야지 일방적으로 자르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유엔사측 경비원들은 인민군의 요구를 무시하고 인민군 경비병들에게 도발적인 행위를 시작했다. 그래서 인민군 경비병 5 명이 부상을 입어 자위적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사건은 유엔측이 계획적으로 자행한 도발행위이며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에서 긴장을 조성시키는 목적으로 꾸며진 것이다. 그 증거로는 지난 8 월 6 일에도 바로 이 나무를 자르려는 것을 못하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더 많은 인원들을 투입해서 나무를 자르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을 제 5 감시초소에서 전방 지원부대 부책임자, 유엔사 당직장교, 그리고 다른 장교들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유엔사 측이 제시한 사진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유엔측이 사전에 계획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는 인민군측이 현장에서 경비장교 회의를 하자는데도 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사측은 「야만한 살인사건」이니 「잔인한 행위」이니 하면서 우리를 욕하면서 자기들의 범행을 가리려 하고 있다』

북한측 수석대표는 한술 더 떠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건 가담 주모자들을 엄히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기가 막힌 적반하장이었다.

유엔사 수석대표는 유엔군 사령관의 항의문을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게 전달할 것을 다시 한번 요구하고는 휴회를 제의했다. 북한측이 할 말이 더 많은 듯했다. 이 밖에도 비무장 지대나 공중, 해상에서 유엔사와 국군이 정전협정을 위반했다는 사항을 읽어 내려간 뒤 발언을 끝냈다. 하지만 북한측 역시 정치선전을 자제, 발언이 이례적으로 짧은 편이었다. 아마도 북한은 이 제 379 차 본회의에서 다룬 것으로 8·18 사건이 마무리될 줄 착각했던 것 같다. 유엔사는 그와 같은 착각을 원했다. 북한이 「나무자르기 작전」에 대해 미리 아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대대적인 「나무자르기 작전」

8월21일 아침이 밝았다. 한국 특전대와 한국 제1사단 소속부대, 그리고 미군 공병단이 벌써 유엔사 전방지원부대에 와 있었다. 21일 오전 7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미 제2사단 작전 담당구역으로 바뀌면서 「폴 번얀(Paul Bunyan)작전」, 즉 「미루나무자르기 작전」이 개시됐다. 바로 5분 전 스위스, 스웨덴 등 중립국 감독위원회 대표들에게 이 작전을 알리면서 신변 안전을 우려, 후방으로 후송되길 원하느냐고 물었으나 그들은 그대로 남았다.

유엔사 판문점 경비부대 1개 소대와 한국군 특전대원 64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미군 공병단원 16명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했다. 군사분계선 남쪽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가는 도로변 두 개의 북한측 초소에서 차단기들을 제거하고 문제의 미루나무에 도착했다.

이때 북한측 경비병들은 공동경비구역, 특히 회담장소 부근에는 한 명도 남지 않고 후퇴했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에서 이 작전의 진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투공병단과 특전대는 진입한 지 불과 20여분만에 미루나무를 자르기 시작했고, 동시에 그 작업에 대해 처음으로 북한측에 통보했다. 「8월18일 유엔사측 작업반이 북한측 경비병들한테 공격받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끝난 작업을 평화적으로 끝내기 위해 오늘 아침 7시에 유엔사 작업반이 진입했으며, 이 나무를 절단하자마자 작업반은 철수할 예정이니 이 작업반을 방해하거나 공격하지 않으면 아무 폭력사태는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오전 7시48분 미루나무는 28분만에 완전히 제거됐다. 「폴 번얀 작전」은 성공리에 끝났다. 북한측은 10분 뒤 유엔군 수석대표에게 항의전문을 보내 ▲유엔사측이 3백명의 전투병력을 불법적으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진입시키고 ▲「군대비행기」의 엄호 하에 또 다른 수백명의 전투병력을 건너편 언덕 위에 배치하고 ▲「오만하게도」 북한측이 돌보던 나무를 마구 자르고 있다면서 이것은 비단 정전협정 위반일 뿐 아니라 북한에 대한 도발이며 쌍방간에 심각한 무력충돌을 초래하려는 계획적 도발이라고 비난했다.

그후 오전 11시 북한측 수석대표는 또 다른 전문을 통해 8월19일 군정위 본회의에서 유엔군사령관이 조선인민군총사령관에게 보낸 메시지에 대한 답변을 전달하겠다며 한 시간 후인 정오에 만날 것을 제의했다. 형식은 쌍방 수석대표간의 비공개 회합이었다.

유엔사측에서는 수석대표와 비서장, 그리고 본인 3명이 참석했고, 북한측에서는 수석대표와 비서장, 그리고 참모들이 마주앉았다. 북한측 수석대표 한주경 소장은 우리가 앉자마자 준비한 발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본인은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동지의 위임을 받고 그가 당신측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통지문을 전달합니다.

「판문점에서 오랫동안 큰 사건이 없었던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이번에 사건이 일어나서 유감입니다. 앞으로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측이 다 같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당신측이 도발을 사전 방지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측은 절대로 먼저 도발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발을 받을 때만 오로지 자위적인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측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본인은 당신이 이 통지문을 가장 빠른 방법으로 당신측 총사령관한테 전달할 것을 요망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이 통지문을 어떻게 평가할까. 미군 경비장교 두 명을 도끼로 찍어 살해하고도 여전히 『우리는 당신측이 도발을 사전 방지할 것을 촉구합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개전의 정이 없다고 볼 것인가. 당시에도 「폴 번얀작전」이 군사충돌없이 끝나자 작전을 계획할 때는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혹시 전쟁이나 나지 않을까 벌벌 떨던 사람들이, 인민군총사령관의 유감표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왜 좀 더 강력한 응징을 하지 못했느냐는 비난은 주로 서울에서 나왔다. 워싱턴은 오히려 조용했다.

지난 해 잠수함 침투사건과 관련해서 북한이 한국정부에 사과의사를 표시해오기는 했지만, 1953년 7월27일 휴전 이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에 이르기까지 23년 동안 북한은 한번도 자신들이 자행한 행위에 대해 유감을 표시한 적이 없다. 그때까지 북한은 5백18건의 무장침투와 6백45건의 쌍방교전을 유발하면서 미군 85명, 국군 3백68명, 한국 민간인 1백48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럼에도 유감은커녕, 침투사건들을 남조선 인민들의 반미 반정부 투쟁으로 왜곡하면서 오히려 미군이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한다는 식으로 역선전을 벌여왔다.


강경대응 회피한 닉슨대통령

이런 북한, 사소한 제재에도 전면전 발발도 불사한다는 배수진을 치고 대응하는 북한에 대해 유엔사로서는 대응책이 마땅치 않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도 전면전을 각오하고 강력히 대응할 수 있으면 문제는 쉽다. 하지만 한국이나 미국, 유엔사측은 북한처럼 그렇게 단순한 사회가 아니다. 「미루나무 자르기」 사건은 미국이 전면전을 각오하고 실행에 옮긴 가장 강력한 대응으로 나는 기억한다.

그간 북한의 도발에 유엔사측이 얼마나 무력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있다. 69년 4월15일 북한의 미해군 EC 121 정찰기 격추사건이다. 이날 새벽 5시 일본 아쓰기 미 공군기지를 이륙한 4발 프로펠러 엔진의 이 정찰기는 해군 승무원 30명과 해병대원 1명을 싣고 동해의 공해 위를 비행하면서 통상적인 전자정보 정찰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전자정보 정찰비행은 69년 첫 3개월 동안에도 1백90차례나 실시돼 북한도 이미 파악하고 있는, 그야말로 통상활동이었다. 그리고 항로는 북한 해안으로부터 50해리(마일) 안으로는 들어가지 말라는 엄격한 지시에 따라 철저히 공해 상공으로 설정돼 있다.

이날도 EC 121기는 북한 영해에서 90마일이나 떨어진 공해를 날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의 미그 전투기가 불의의 기습공격을 가해 EC 121기를 격추시켰다. 이 사건을 먼저 발표한 측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관영 라디오 방송을 통해 4월15일 오후 북한 영공에 침입한 대형 미 정찰기를 격추했다고 보도한 뒤 군정위 본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유엔사는 이에 응하기로 했다.

미국측의 대응은 결정되지 않았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31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건이 발생한 3일 후까지 공개 발표를 늦췄다. 그러더니 결국은 군사적 보복을 피하고 EC 121의 정찰비행을 계속한다는 결심을 발표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마무리지으려 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이라크가 유엔사찰을 지원하기 위해 자국 상공을 날아가는 미 U2기를 격추시켰다고 생각해보자. 미국의 대량 군사보복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월남전의 수렁에 깊숙이 빠져있던 미국은 새로운 전쟁을 치를 만한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북한측에 대한 책임 추궁을 사실상 포기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의 유약한 태도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보다 1년전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때 닉슨은 당시 존슨행정부가 군사보복 대신 협상을 통해 승무원들의 귀환협상을 벌이자 『존슨이 보잘것없는 3류국가인 북한을 벌주지 못한다』고 맹렬히 비난했었다.

그러나 푸에블로호 승무원 82명은 약 1년간의 비밀협상을 통해 돌아왔지만 EC 121 정찰기 승무원은 31명 모두 숨졌고, 소련 함대가 발견한 시체 2구만 미국에 송환됐을 뿐이다. 북한에 잡힌 인질도 없는데 무엇을 망설이는가. 평면적으로 비교해보면 당장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더구나 북한에 대한 강력대응을 다짐해오던 닉슨 아닌가. 북한은 EC 121 격추에 참여한 북한 공군의 「노고」를 공식적으로 치하하기까지 해 미국의 자존심을 괴롭혔다.

닉슨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다른 이유는 당시 미국이 내밀하게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추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르샤바에서 미·중 접촉에 진전이 있었고, 이듬해 초 헨리 키신저 대통령 안보담당보좌관이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할 계획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중국과 군사적으로 충돌할 가능성을 배제하려 했던 것이다.


수세에 몰린 유엔군

북한은 미국이 미약하게 나오자 69년 4월19일 소집된 제 290차 군정위 본회의에서 아예 이 사건을 언급조차 하지 않고 넘어가려 했다. 회의 소집을 요구한 쪽이 첫 발언을 하게 돼 있는 관례에 따라 첫 발언에 나선 북한측 수석대표 리춘선 소장은 4월10일부터 16일까지 비무장지대 안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총격사건에 대해서만 유엔사측에 항의했다.

이어 반격에 나선 유엔사 수석대표 냅 공군소장이 이 사건을 본격 거론했다. ▲EC 121 항공기는 북한 영공에 침범한 사실이 없고 ▲이 항공기는 북한의 거듭된 침략행위와 위협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합법적인 정찰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프로펠러 엔진으로 추진되는 비무장 항공기가 북한에 위협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이 사건은 명백히 북한의 계획된 침략행위였다고 규정했다.

그런 뒤 북한에 대해 이 사실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유사한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제반조치를 취하라고 말한 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입을 다물었다. 맥이 빠졌다. 사건 규정은 제대로 됐는데 사후 대응책이 빠져있었다. 대응책이라면 북한이 이 사건을 진지하게 토의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회의장을 퇴장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오히려 북한 리(李) 소장의 목청이 더 높았다.

『당신은 방금 지난 4월15일 미국정부가 우리나라 후방에 대한 정찰을 목적으로 대형정찰기를 불법 침입시킨 날강도적 침략행위에 대해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EC 121 대형정찰기가 어디에 소속돼 있는 비행기입니까』

그는 냅 소장이 대꾸하지 않자 『그 비행기의 소속을 말하시오. 그러면 내가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거듭 재촉했다. 그가 소속을 물은 것은 EC 121 정찰기가 유엔군 사령부가 아니라 미 태평양사령부나 정보기관에 소속된 것이라고 답변할 경우, 이 문제를 군사정전위가 아닌 북한과 미국의 직접대화로 끌고가겠다는 심산인 것으로 해석됐다.

유엔사 정전위 대표들은 미리 정한 지침대로 모두 동시에 일어나 일방적으로 회의장을 퇴장했다. 정전위 역사상 유엔군이 일방적으로 퇴장하기는 이것이 두번째였고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날 저녁 평양방송은 퇴장을 통한 유엔군의 항의표시를 이렇게 해석, 보도했다.

『인민군 수석대표가 적측 수석대표에게 대형정찰기를 불법으로 북한 상공에 침입시켜 북한 후방의 비밀을 탐지하려 한 적대행위를 항의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회의장에서 도망쳐버렸다』

날조보도였지만 그렇게 보도한다고 해도 명백히 아니라고 말할 근거가 회의록에는 전혀 없다. 유엔사 수석대표의 항의에 북한군 수석대표가 반박하자 유엔군 수석대표는 아무 말을 안하고 회의장을 나간 것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엔사와 미국에 수모를 가한 북한은 닉슨 대통령이 한반도 주변에 해·공군을 증강하며 무력시위를 하자 4월23일 정부 공식성명을 내고 『미국의 전쟁 도발에 대응해서 모든 조선인민과 인민군은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로동당 주위에 똘똘 뭉쳐서 보복은 보복으로, 전면전쟁은 전면전으로 대응해서 피로 전취한 사회주의 조국을 수호하자』고 의기양양하게 결의했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에 비춰볼 때 8·18 사건에 대한 조선인민군총사령관의 유감표명은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유엔사는 76년 8월25일 제 380차 군정위 본회의를 소집, 유감표명과 재발방지 다짐을 「긍정적인 조치」로 받아들인다고 한 뒤 잔인무도한 행위를 자행한 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북한대표인 한소장은 유엔사측이 회의 때마다 가담자 처벌을 요구하자 『당신은 처벌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도 당신측의 모든 요구와 함께 우리 (최고사령관) 통지문에 다 조합돼 있습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답변했다.

그는 북한측의 말뜻을 유엔사 수석대표가 고의로 무시하는 것인지 또는 문장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 유감의 뜻에는 8·18 사건 관련자들의 처벌까지도 포함된다는 뜻이었다. 유감표시만으로 어떻게 처벌의 의미까지 포함된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김일성을 우상화하고 있는 북한체제에서는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버이 수령」 김일성으로 하여금 유감을 표명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한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물어야 한다는 게 그쪽에서는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르니까.

북한은 여기에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내 양자간 활동영역을 구분하는 조치를 제안했고 유엔사측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오늘날처럼 쌍방 경비원들이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격리됐으며,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던 북한 경비초소 4개도 철거됐다. 사실 이 방안은 1970년 유엔사가 제안했지만 북한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하략)

_______________________
연평해전, 2차 서해교전 때도 우리 쪽 '주모자'를 '처벌'하라고 억지를 부렸던 건 의외로 오래된 전통에서 기인한 듯하다.
하긴 연평해전은 우리의 승전으로 기록되고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을 세운 관련 장성들이 다음 인사이동 때 죄다 옷을 벗어야 했지.... 이것은 주모자가 처벌받은 것일까? 아님 단순한 인사발령일까? 진실은 저 너머에.

by 스칼렛 | 2007/08/18 11:35 | 퍼온글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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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Newtype at 2007/08/18 12:54
깡패국가 북한...
답이 없네요.
Commented by 死海文書 at 2007/08/18 13:21
제정신이 아니네요.
Commented by 스칼렛 at 2007/08/18 17:38
Commented by ㅁㅇㄴ at 2007/08/18 15:23 # x
펌글은 자제 부탁드립니다^^

라는 ID무작위생성 비로그인 리플 하나를 삭제했습니다. 저작권법 저촉소지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익명 뒤에 숨어서 까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글을 놔둘 정도로 주인장이 관대하지는 않습니다.

ID가 무슨 뜻인지 알기는 아나? Identification number. 하이텔 시절 쓰던 표현은 이용자번호. 말 그대로 자신이. 누군지. 알리기. 위하여 쓰는 전뇌상 가상인격체계. 그걸 무슨 난수조합 쯤으로 아는 인간은 이 블로그에서 말할 권리 따윈 부정됩니다. 왜, 말은 하고 싶은데 책임은 지기 싫어? 그럼 말하지 마 개자식아.
Commented by joogunking at 2007/08/18 22:32
길지만 정말 알찬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도끼만행 사건에 대해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알고나니 여러 생각이 드는군요.
나무 한그루 때문에 전쟁이 날 뻔도 했다니 정말 아찔합니다.
Commented by 긁적 at 2007/08/18 23:08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그나저나. 저렇게도 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는게 신기하군요. ㅋ

갑자기 궁금해진것. 저 박철 중위. 어떻게 되었을까요 -ㅅ-;;;;;;
Commented by 玄武 at 2007/08/19 01:36
http://comm.kdlp.org/index.php?page=2&jact=art_read&seq=15&art_no=490527&num=20&category=0
문제는 이런 개그를 믿는 계층이 아직도 있다는 거죠...-_-;
정말 국보법이 '필요악'이 되는 이유랄까..
Commented by darkuldoru at 2007/08/19 02:59
아 이런 일도 있었군요. 덕분에 언제나 좋은글 읽습니다. 하지만 저 리플에 더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ㅁㅇㄴ의 대한 리플말이지요.
Commented by 스칼렛 at 2007/08/19 23:25
Newtype// 저 때는 그나마 막장태크는 안 탔었죠.;
死海文書// 역사적으로 저러한 도발 사례는 많습니다. 나무베다 죽은 장교들만 불쌍하게 되었지요...
joogunking// 트집잡으려면 별 희한한 걸로도 트집잡힐 수 있는 거겠죠. 역사적으로 많은 사례가 있고.
긁적// 그러니 북쪽은 김일성 죽고 나서 나라가 개판 됐죠. 독재의 폐단. 아마 '미제를 때려죽인 공화국 영웅'이 되지 않았을까요...;;
玄武// .... 저런 소설을 믿는 애들이 있을까 무섭습니다.
darkuldoru// 나 말이냐 아니면 저 찌질스 말이냐.
Commented by darkuldoru at 2007/08/20 05:16
당연 스칼렛형님 말씀이지요. 설마 저 사람아닌것 같은 말에 감명받겠습니까...
Commented by anaki at 2007/08/20 08:49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이름만 알고있었는데 이런일이 있었군요
Commented by winbee at 2007/08/22 11:55
푸에블로호 경우에는 나포되었을때 미국에서 표면상 해양조사선이라는 발표를 했지만
1년동안 끌었던 이유가 그 안의 감청용 전자장비들 때문이라는 썰도 있었죠(요미우리 보도에 의하면).
그걸 빌미로 북한은 이리저리 인질을 질질끌고 다녔지만 그래도 풀려났던 이유중 하나는
지금봐도 예술품인 SR71의 정찰 덕분이었지요.미국이 증거사진을 코앞에 제출하니까
북한은 곧잘 협상에 응할수밖에 없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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