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운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속,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ㅡ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ㅡ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지난 토요일, 파주 금촌에 스브적 다녀왔습니다. 랜디님의 호의로, 자택에서 필름스캔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볼 수 있었죠. 예전에 살던 불광동에서는 그다지 멀지 않았겠지만 - 이 곳 관악산 자락에서는 파주라는 곳은 생각외로 매우 머나먼 여정이더군요;; 특히 경의선 철도 노반붕괴사고의 여파로 인해 더했습니다.
게다가 그날따라 '신림6동에 친구보러 들렀어요'라고 지인에게서 온 연락 문자... 하지만 그때 내 몸은 이미 북으로... 북으로... 아! 운명도 야속하시지. (문자보내신 분께는,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호아라.... 발걸음한 김에 뵐 수 있었을 텐데.... 여건이 안 되어 참 아쉽고 죄송합니다.)


금촌역까지 자가용 끌고 데리러 온 랜디님을 기다리는 동안 -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운전기사 아저씨와 버스 승객의 축 늘어지는 경기도 사투리의 잡담을 들으며, 예전에 살던 고향같은 그리운 시골풍경을 떠올립니다. - 그러나 겉으로는 한적하고 정적인 읍내 역전 분위기지만,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은 확실히 이 곳이 전연지역에 가깝다는 걸 느끼게 해 줍니다. 사람이 내뿜는 '기'라는 게 실제로 있나 봅니다. 정작 군인은 몇 명 못 보았는데도....
그리고 마침내 나타난 사진가는 제가 미처 인사할 겨를도 없이 철커덕 하고 사진을 찍어버렸습니다. 순간샷 속도가 굉장하시더군요. 들고있던 기종은 코닥 레티나. 정말 작아서 찍히는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갈 정도로 정숙합니다.


필름을 스캔하는 동안 침대 위에 퍼질러놓은 인화물들과 랜디님이 소장한 카메라. (코닥 레티나와 후지 파노라마)
필름을 하나하나 읽어내서 꼼꼼하게 스캔해주시는 랜디님의 감사한 수고에 시간이 금새 훌쩍 지나갔습니다.

해지는 시간의 빛이 좋으니 사진 좀 찍고 가자는 걸 아쉽게 만류하고, 한 시간마다 있는 돌아가는 열차 시간이 가까워오길래,
랜디님의 호의를 뒤로 하고 그냥 역에 도착했습니다. 저녁에는 통근열차가 서울역까지 운행해서 그걸 타고 오기로 했던 거죠.
가뜩이나 가좌역 노반 붕괴사고 여파로 열차 운행시간표가 줄줄이 꼬이고 열차들이 연착하는 판국이라...

(* 현재 가좌-수색간은 복구는 되었지만 안전점검 문제로 단선운행중. 낮 시간에는 서울역이 아닌 수색까지만 열차가 다닙니다.
수색역에서 열차가 플랫폼에 한참 서있는데, 자세히 보시면 예전에 사라졌던 추억의 '통표(通票)' 가죽 케이스를 역무원이
주고받는걸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 전기 신호가 없을 때 쓰던 둥그런 금속 운전허가증이 통표인데, 이게 있어야 기차가
선로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기관사가 역에 진입하면서 플랫폼에 걸어둔 통표를 휙 낚아채가면 그 동안에 역과 역 사이의
해당 선구는 통표를 소지한 열차 외에는 아예 열차진입을 못하게 막아버리죠. 정면충돌이나 추돌사고를 막기 위해서.... )



생각해보니 저는 명색이 철도 팬 - 마니아라고 하기엔 내공부족임 - 인 주제에 철도사진은 거의 없네요.




의도한 생각대로 나오지 않아서 살짝 아쉬운 컷. 찍었을 당시에는 재밌겠다 싶었는데,
인물이 들고 있는 책이 생각 외로 눈에 확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럴 때 DSLR이 아쉽네요.
야시논 렌즈답게 측면으로 들어오는 빛은 잘 표현해낸 것 같지만.....
그나마 듀오톤으로 처리해두니까 빛의 느낌은 조금 사는 것 같습니다.




반대편 선로로 열차진입음이 나서 안전문제로 접근할 수 없었기에, 할 수 없이 이렇게 찍은 철로.
생각보다 느낌이 좀 어정쩡하네요. 줌렌즈가 아쉬운 대목입니다.




정지 표식 밑에 5량이라고 적혀 있군요. 서울역 플랫폼의 경우에는 저 정지표식이 세 군데에 있습니다.
기관사는 저 정지 표식과 기관차의 선두부(내지는 기관실) 위치를 맞춰서 열차를 세우게 됩니다.
(수도권 지하철의 경우에는 [10]이나 [8](도시철도공사)이라고 적힌 표지가 있습니다.)

열차를 정위치에 세우기 위하여는 고도의 훈련과 기술, 그리고 축적된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번에 모 서울시장은 서울메트로가 파업했을 때 "열차는 아무나 몰 수 있다"라는 망언을.... ㄱ-;;
실제로 파업 때 보면 좀 전동차의 정차가 덜컹거리거나 유격이 안 맞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대부분 특전사 병력같은 예비인력이 투입된 경우입니다. (은퇴한 기관사분들은 실력이 좋지만.)




들어온 열차는 여객편성이 아니라 선로보선차였습니다.
아무래도 이 곳 금촌역에서 교행할 것 같습니다.






젊은 아가씨도, 살짝 나이를 넘긴 언니도,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할머니도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서
사랑과 희망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윤동주처럼 간신한 그림자를 철로에 늘어뜨리고....





역시 단선운행에다가 가좌역 사고 여파로 운행시간표가 줄줄이 꼬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지정된 발차시각을 훌쩍 넘겼는데도 열차는 오지 않습니다.
5분쯤 늦어지겠다는 역장님의 안내방송이 들려오지만, 승객들은 뭐 그러려니 하면서
초조한 기색도 없이 흐느적하게 앉아있는 것이, 확실히 촌의 넉넉한 여유가 느껴집니다.





낯선 그녀에게서 사진애호가의 향기가 느껴진다....
확실히 이 날, 날씨가 정말 좋았죠.




마침내 통근열차가 들어옵니다.

거 참, 포트라로 바꾼 지 얼마나 됐다고... 후지 오토오토의 색감을 보면서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스스로도 피식 웃습니다.

이 롤은 결과물들이 대체로 뭔가 묘하게 2% 부족한 듯한 게 많아서 아쉬웠습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이 CDC - 통근형 디젤동차 - 의 앞얼굴은 뭔가 찐빵같은 게, 어벙하게 느껴져서 친숙합니다. ㅎㅎ

이놈의 이름은 CDC - Commuter Diesel Car - 라고 하는 국산 고성능 차량입니다. 출입문이나 생겨먹은 게
꼭 흔히 보는 전동차처럼 생겨서(전기가 아니라 디젤엔진입니다), 신촌 연대앞 굴다리에 이게 지나갈 때
가끔 사람들이 '어 전철 지나간다' 라고 얘기하는 놈이죠.
일본의 설계개념 영향을 많이 받은 무궁화동차(NDC)와 달리, 이놈은 국산기술의 승리. 통근형에 맞게 가감속 성능도 좋고,
5량까지 연결할 수 있으며, 꽤 빠른 스피드를 낼 수 있습니다. - 단지 문제는, 이게 고속주행 성능이 좋은 반면에
무게가 좀 가볍다는 문제가 있어서 산악지형에서는 바퀴가 가끔 헛돕니다 ㄱ-;
(새마을호 동차나 옛날에 가끔 다니던 무궁화호 동차는 디젤액압식 엔진이 직접 구동축을 돌립니다.)
이건 새마을 동차(PMC)도 마찬가지.... 그래서 높낮이차가 심한 구간은 동차 대신 디젤이 견인하거나 중앙선, 영동선은
아예 산악지형에 맞게 설계된 알스톰제 전기기관차(8000호대라고 부릅니다)가 투입됩니다.
요즘은 전철화가 잘 되어서 성능좋고 조용한 지멘스제 전기기관차도 꽤 보이더군요. (흔히 8200대라 부르는 거...)

의외로, 우리가 디젤기관차라고 부르는 그 흔히 보이는 큼지막한 녀석은 '디젤전기기관차'입니다.
미국 EMD사에서 만든 녀석으로, 디젤엔진으로 발전기를 돌려서, 그 전기로 모터를 구동하는 원리인데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죠; 앞서 말했듯 적당히 묵직한 무게인지라 한국지형에 잘 맞는 팔방미인입니다.
이거 얼마전에는 북한에도 갔다왔죠. 북한지역에서 혹시나 문제있을 경우에 자력운전이 가능하도록....





반면 물찬 제비처럼 날렵하게 들어오는 KTX... 꼬리가 안보입니다.
(앞에서 보면 얘도 TGV계열의 그 특유의 생김새가, 제비보다는 꼭 말대가리같지만. ㅋㅋ)

조금 있으면 얘를 바탕으로 95% 이상 국산화해낸 KTX-II HSR350, 일명 <한빛400>이 나오겠죠.








Yashica Electro35 GS, Yashinon Color-DX F1.7-45mm, F 16, AUTO
Fuji Autoauto X-TRA 400


dream_railroad-2.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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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칼렛 | 2007/06/13 00:50 | 스케치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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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초령사신 at 2007/06/13 01:02
스칼렛님 사진을 보고 있자면..
자꾸만 밖으로 놀러 나가고 싶어져요~
Commented by 狂猫 at 2007/06/13 01:28
특전사가 열차도 몹니까...ㄷㄷㄷ
Commented by 스칼렛 at 2007/06/13 01:43
초령사신// 이번 주말은 날씨가 좋았죠. 장마철이 오기 전에 어디론가 훌쩍 떠나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狂猫// 열차, 선박, 비행기 등을 모는 특수교육과정이 있습니다. 특전사의 임무특성상 적지 내 깊숙한 곳의 목표를 타격한 후 퇴출해야 하기 때문이죠. 유사시에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입니다. 주로 특전부사관 중에서도 고참들이 교육을 이수한다고 합니다. (특전 출신분 말로는 공수나 해상침투, UDT에 비해서는 그나마 덜 빡세대요.)
Commented by 海月 at 2007/06/13 08:47
금촌역 참 오랜만에 보는군요. 저도 예전에 지인을 만나러 몇 번씩 갔었는데... 많이 변하진 않았네요. ^^
Commented by sunny at 2007/06/13 09:40
혼자였을 때는 무작정 기차 타고 춘천도 가고, 강릉도 가고... 참 잘 다녔었는데... 이제는 그런 낭만은 꿈도 못 꾼다지요.
하지만 딸내미가 아장아장 걸을 때면 함께 이곳 저곳으로 나들이 갈 새로운 꿈이 생겼다지요. ^---^
글 읽고나니 저도 금촌 다녀온 것 같네요.
Commented by Dataman at 2007/06/13 10:11
금촌역사 뒤엣것이 복선화 역사 공사장이로군요. 경원선에서도 느꼈지만 복선화공사하면서 대체 이 노선이 국가의 간선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기야 중앙선도 그런가...
Commented by 스칼렛 at 2007/06/13 11:36
海月// 아직 시골역 분위기가 남아있더군요. 조만간 전철 홈으로 바뀔 것 같지만....
sunny// 저는 고향이 하루에 기차 다섯 번 지나가는 곳에서 살아서 특히 기차에 대한 추억이 많습니다. 군북역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그게 또 진해 군항제 못지않은 장관이었죠.... 군북역사 철거되기 전에 사진으로 남기러 가야 하는데....
Dataman// 특히 분당선이 아쉽죠. 지상 2복선으로 깔아서 미래의 용량대비 및 동서울간선축 설계를 했어야 하는데.
Commented by Dataman at 2007/06/13 12:24
분당선은 애매하죠. 이게 경부선과 장거리 병행할 정도로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혹은 우회노선이라 하기도 뭣하고요. 선형을 조금 더 폈으면 고속철도 우회노선으로 썼을 법하긴 합니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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