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혹은 코가네마치(黃金町)



1937년 경성전도. 지금 지도와 펴놓고 비교해 봐도 재미있는 면이 많습니다.
(클릭하시면 큰 사이즈가 나옵니다.)




예전 포스팅 '명동, 그 '혼마치도리(本町通)'의 흔적' 으로부터, 이어서 계속.

일본인들은 메이지 유신 당시에 도쿄에서는 할 수 없었던 도시계획을, 조선이나 만주 등지에 자신들이 건설하는 도시에 도입해 보고자 했습니다. 조선이나 만주나 어차피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으니 그들 뜻대로 개발하기는 참 쉬웠겠습니다만, 만주의 경우 완전 허허벌판에 길을 낸 것에 비해 조선, 특히 서울의 경우에는 신작로를 내면서 멀쩡한 마을이 몽땅 내려앉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지금의 공덕-만리재길, 노량진(원래부터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왕십리 부근이었죠. 조선 양반들이 있던 동네는 그 동네의 양반들이 토호 노릇을 해서 마을이 온전한 경우가 많았지만 (대신 접근성이 떨어져서 결국 마을이 쇠락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습니다), 서민부락의 경우엔 보상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그냥 동네 한가운데로 직선으로 길을 내 버리고 초가삼간을 철거하고, 저항하는 부락민의 경우에는 공무집행방해랍시고 잡아다 가두는 형국이었죠.

그나마 역설적으로-_- 일제강점 이후에는 법치를 한답시고 재판이라도 갔고 금고형으로 끝났지만, 대한제국 시절에는 '일본군'이 임의로 이런 철거민들 중 항의하는 사람들을 '비적'이랍시고 약식으로 군사재판을 한 후 - 아마 6.25 인민재판보다도 간단한 차였을 것입니다 - 그냥 말뚝에 비끄러매고 총살해버리거나, 아니면 목을 매달아서 본보기로 주렁주렁 달아놓았죠. (의병 신돌석 장군같은 사람들이 철도시설 습격에 주력한 이유도 이러한 사태의 저항에서 비롯됩니다)



어쨌든, 기본적으로 경성의 도시계획은 세 가지 축선을 바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 일본인들의 두 생활거점인 메이지쵸(明治町:명동)와 혼마치도리(本町通:진고개,충무로)를 이어줌과 동시에 종로의 기능을 대신할 수도 경성의 동서축선이자 제2간선 역할을 하는 코가네마치(黃金町:을지로).
2. 공공업무중심지구인 총독부, 경성부청(현 시청)과 메이지쵸(명동)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하세가와마치(長谷川町:소공로).
3. 구 상업도심인 보신각 일대와 신도심인 메이지쵸, 그리고 중심가로 진출하는 하세가와마치와 접속함과 동시에 또한 경성역 및 용산 방면의 외곽으로 진출하는 축선을 만들어주는 난다이몽도리(南大門通:남대문로).

특히 2와 3의 경우는 경쟁자였던 중국 화교들의 상권을 완전히 단절케 하여 박살내버리는 효과도 있었는데, 이건 다음에 살펴보고... 오늘은 을지로에 대한 얘기부터 해 볼까 합니다.



종로의 그것을 흉내냄과 동시에, 정확히 대척되는 길인 을지로.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 청계천(사실 이것도 일본이 붙인 이름입니다. 그 이전의 조선 사람들은 그냥 개천이라고 불렀다 합니다)을 경계로 그 이북은 조선 600년의 메인스트리트였던 운종가가 있었고, 공공업무지구인 육조거리(현재의 세종로-태평로를 잇는 축선) 로 연결되며 그 배후 주거지로 북촌 - 현재의 종로구 일대 - 이 자리하고 있었죠. 즉 종로 일대 이북은 기존 조선의 생활공간으로서의 도시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종로 이남에도 조선 사람들이 원래 살고 있었지만, 대부분 가난한 선비의 집이나 여염집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일본인들이나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거리로 만들기가, 북촌보다는 비교적 쉬웠겠지요.

청계천 이남에 일본인들은 자신들만의 중심가를 뚫습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제2동서축선인 을지로였죠. 물론 서소문의 경성방송국을 찾아가지 못해 생방송 성우들이 펑크를 낼 정도로, 그 당시의 서울 도로사정은 좀 많이 엉망진창이긴 했기에 - 도시계획상으로 새로운 축선을 개발하여야 했겠습니다만.... 대한제국 말기에 수립되었던 도시계획(보신각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가 날 예정이었다 하죠)은 나라 뺏기면서 유야무야되고, 일본 행정가들이 새로 뚝딱 그린 계획도에 따라 그 축선이 지나는 곳을 보면,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지였던 메이지쵸(명동)와 최대의 환락가인 혼마치도리(진고개, 충무로)를 바로 이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을지로, 옛 이름 '코가네마치(黃金町)'입니다.

한자로 黃金町이라고 쓰는 것부터가 의미깊습니다. 일본인들로서는 이 곳을 조선의 메인스트리트로 만듬과 동시에 자신들의 근거지가 중심지가 되길 원했을 터입니다. 이름지은 철학에서 그러한 의도가 엿보이죠. 비록 청계천 이남 지역이라 해도 개천에 면한 곳은 원래의 지명을 간직하고 있고 지금도 동명으로 남아있는 곳이 많습니다만, 이 코가네마치를 기준으로 남부의 지명은 모조리 일본식으로 바뀝니다. 동시에 때를 같이하여 '운종가'는 '종로'로 이름이 격하됩니다. (물론 조선 사람들이 옛날에 종각이란 말을 안 쓴 건 아니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하여 이 지명이 못박혀버리게 되죠. 개인적으로는 현재도 지하철역 이름이 종각역인 것을, 보신각으로 환원하였으면 합니다.)



반면, 예전 글에 썼다시피 이 곳 광교와 구리개(현 을지로입구역)부터는 조선 사람들의 상권이, 그나마 일본 상권에 맞서서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지역입니다. 일제는 3.1운동때까지는 아예 조선인들은 회사를 세우지도 못하게 하는, 이른바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의 기존 상업자본을 철저히 탄압하였습니다. 저희 증조부도 이 때 방직공장이 망하고 홧병으로 돌아가셔서 할아버지 9남매는 거리에 나앉았다고 하더군요....;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결혼한 후 만주로 가셨고, 막내할아버지의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원효로에 그대로 눌러앉아 계십니다-_-; 경상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 옛 서울말 - 영화 태극기휘날리며에서 늙은 진석이 쓰는 말투 - 쓰는 친척이 있는 이유.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호적등본을 떼어 보니 경기도 시흥군 안양면이라고 나오더군요... 쿨럭)

마포의 경강상인, 종로 육의전, 고리채와 선물도매로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장안의 큰손들이었던 '관노'들(이들은 조정에서 돈 만지는 일을 했기 때문에, 신분은 노비였지만 대단한 거부였다 합니다. 1895년 대홍수 때에는 한 관노가 쌀 5천 섬을 시장에 풀어 구휼할 정도였다죠.), 그리고 조선 후기 삼대 포구였던 경상도 부산포, 마산포, 충청도 경강포의 거상과 객주들 - 이들은 정말 철저하다 싶을 정도로 망합니다. 변화하는 시대상에 부응하지 못해서였을 수도 있고, 일본인들의 자국 자본 식민 정책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민족자본이란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조선상업은행, 현재의 우리은행), 그리고 한성은행 (漢城銀行:현재의 신한은행) 정도였습니다. 한성은행은 우리에게는 '조흥은행'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죠.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만.... 어쩌면 당시, 두 은행 모두 대한제국의 국책은행이었기에 그나마 민족자본의 이름을 걸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보시는 건물은 조선상업은행 종로지점 건물입니다. 현재는 우리은행 종로지점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 건물의 정식 명칭은 '광통관(廣通館)' 이라고 합니다. 근처에 광통교(광교)가 있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하며, 당시 대한제국 탁지부에서 세운 건물로 소공동의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건물보다는 3년 정도 먼저 완성되었죠.

탁지부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재정경재부 청사쯤 되는 셈입니다.
이를테면, 을지로의 야트막한 구리개 고개를 사이에 두고 두 나라 자본의 메카가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물론 경술국치 이후에는 광통관이 일본인들의 상공회의소 건물로 쓰이기도 합니다만(.....)


대한천일은행이 이 건물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이 건물이 탁지부 소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관민합동 민족자본으로 설립되었다가, 자본금납입이 모자라 국고를 땡겨쓴 후 고종의 둘째 황자인 영왕(영친왕)이 은행장으로 추대되어 있었죠. 이후 경술국치로 국권을 침탈당할 때 즈음하여 경영이 어려워지자, 일본계 자금 25만원 가량을 땡겨 쓰면서 결국 경영권 방어에 실패하고 일본계로 넘어가는데... 이 때 조선상업은행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이후 8.15를 거쳐 국권을 회복하면서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인 '상업은행'이 되었고, IMF의 여파로 한일은행과 합병하면서 '한빛은행'이 되었다가, 현재 우리금융그룹하의 '우리은행'이 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적자금이 유입되어, 현재 실질적 최대주주는 대한민국 정부죠. (이게 우리은행이 개성공단에 지점을 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면 바로 그 옆 건물에 있었던 한성은행(구 조흥은행의 전신)은 대한천일은행과는 정반대로 같은 시기, 비교적 성공적으로 증자를 이루어 내어 주식회사로서의 길을 걷습니다. 일제의 회사령이 떨어지자 오히려 일본 본토로 치고나가 오사카와 도쿄에 지점을 개설하고 일본인 거부 - 특히 간사이 상권 - 들을 주주로 끌어들이죠. 그러면서 꽤 오랫동안 민족자본의 거두로 기능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도쿄대지진의 여파로 인해 일본 본토에서 타격을 얻어맞고 몇 년간 고전하다가 결국 1920년대말에 조선식산은행(현 한국산업은행)에 경영권을 넘겨줍니다. 비교적 익숙한 조흥은행이란 이름은 1943년이 되어서야 등장하고... 이들이 다시 민족자본이 되는 것은 해방 이후입니다만, 일본계 자본의 성공적인 유입으로 100년을 버텨왔던 조흥이 재일교포 출신 자본인 신한은행(요즘은 사실상 '글로벌화된 한국자본'이지만..)에 합병되었다는 사실은,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습니다.

수많은 일본자본과의 전쟁에서 1920년대의 최일선에 한성은행이 있었다면.... (사실 은행 돈장사 하는 데에 별로 민족의식 같은 건 없어 보이긴 하지만... 이 양반들이 무슨 독립운동 지원하던 경주 최부자나 백산상회도 아니고.) 1930년대는 박흥식이란 인물의 시대였습니다. 유명한 '화신백화점'의 창립자죠.

박흥식의 경우에 그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 자본의 공격에 맞서 종로의 조선상권을 방어한 인물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일제 정관계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친일파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두 가지 측면이 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화신백화점은 1987년에 헐렸기 때문에 지방 출신인 제가 제 눈으로 직접 그 건물을 본 적은 없고, 현재 국세청과 삼성증권이 있는 종로타워 자리라고 하는군요. (개인적으로는 이 건물을 땡전빌딩이라고 부르는데, 옥상 라운지가 꼭 엽전처럼 생겨서. 쿨럭. 국세청 건물이 땡전이면 그것도 꽤 어울리니;;)


종로의 민족자본으로는 박흥식 외에 또 다른 박가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박승직입니다. 현재의 두산그룹 창시자지요. 당시에는 포목점인 두산상회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하긴, 이때만 해도 삼성그룹 창시자 이병철은 대구에서 삼성상회 쌀집을 꾸리고 있었고, 정주영은 도요타(豊田) 엿공장 - 현재의 오리온프리토레이 전신 - 이나 고려대학교 신축공사 현장, 혹은 인천부두 등에서 막노동하고있던 시절이죠;;;;


일본자본의 조선침투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었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경술국치 당시 이미 그들의 거점에서 그들의 즐거운 삶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뭐 세간에 '요코 이야기'가 일본인들 관점에서 그렸다 하는데, 웃기는 얘기고... 일례로 '엄마의 게이죠, 나의 서울'이라는 수기를 보면 이 당시 일본인들이 심지어 일본 본토 - 당시 '내지(內地)'라고 불렀던 - 보다도 더 흥청망청 잘 살았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일제 입장에서는 참 성공적인 식민-_-이었지요....

반면 만주로 갔던 일본인들은 조선 이민자들과 비교해서 별반 팔자 다를것도 없는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 노동자, 그리고 파쇼정권에 의해 축출되었던 지식인들이었죠. - 다키가와사건으로 5대 제국대학에서 쫓겨난 이들이 만주건국대학의 모태가 되었고, 심지어 이들이 일제 패망 이후의 일본 지성계를 재건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어쨌든 소련군에게 살해당하고 끌려가거나 강간당한 사람들도 다들 이런 부류들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편하게 잘먹고 잘살았던 일본인들과는 질적으로 틀리죠.


1920년대까지 종로에 가로등조차 들어오지 않았던 것과 달리, 이 지역은 이미 1910년대초에 전기가 들어오고 전등이 가설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곳의 밤거리는 낮처럼 밝았다 하죠. 거기에 일본인 유곽까지 더하여져 흥청거리는 이 곳을,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중심가라 하여 '혼마치도리'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인들의 거리에서 '도리(通)'는 상업지구를 의미하며,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도시마다 '혼마치(本町)'이라는 지명이 있죠. 마치 영국의 도시에 plaza가 있듯...

예전 포스팅에서 썼듯, 이 곳은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환락의 거리 그 자체였고 조선의 '모던 뽀이'들은 식민지 현실을 개탄하거나, 절망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한량놀음이 좋거나 하여 이곳을 쏘다녔죠.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나 당시 조선일보 가십란 등을 보면 이러한 작태를 많이 꼬집습니다. 그러고보니 글쟁이 이상 선생이 좋아한 까페도 메이지쵸에 있었고, 소설 '날개'의 주인공은 실제로 살고 있기는 '종삼(종로3가의 조선 기방)'의 기생 살림집에 살았지만, 한번만 더 날자며 추락한 곳은 바로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이었군요.

여담으로, 1970년대 서영춘 선생의 코미디곡 '서울구경'은 사실 1935년에 발매된 '시골영감 기차놀이'를 리메이크한 작품이었습니다. 그 노래에서 구경오는 곳이 바로 이 곳 혼마치도리였지요. 언제나 신문물은 이곳으로 맨 먼저 유입되었고, 저희 과의 장경학이라는 교수님도 일제시대 당시에 이 곳으로 책을 사러 갔다고 하시더군요.

이 분은 1916년생에다가 무려 교토제국대학 37학번-_-;; 지금도 정정하심... 함경남도 문천에서 태어나 서울의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고, 식민지 당국이 조선의 고등학교에 대하여는 경성제대 외에 대학입학자격을 주지 않자 마츠야마고등학교로 유학을 가서 교토대에 들어간 입지전적 인물이죠... 이 분, 재작년인가 민법총칙 가르치러 모교에 출강하셨다고 하는데... 학생들이 좀 소란스러우니까 강의하다 말고 출석부를 그 자리에서 쫙 찢어버렸다고 하더군요. 덜덜덜.

제 경우에는 자서전 편집 덕에 교수님과 연이 닿아 있습니다. (실례되는 얘기지만, 자필 원고가 너무 좀 글씨가 그래서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음.) 이 교수님 자서전에도 꽤나 재미있는 얘기가 많습니다. 서울대에 출강나갔다가 신문사에 들렀는데 이병주 남작 - 이완용 아들 - 을 우연히 지나쳤다든가, 일본에서 쇼와 초기의 군국주의의 지성계 탄압 상징인 다키가와 사건(1933)을 직접 겪었다든가....;

여담의 여담. 위에서 말하였듯 이 다키가와 사건으로 축출된 좌파 교수들이 전후 일본지성계의 기둥이 됩니다만... 어느 교수가 전후에 모찌떡 먹다가 목이 막혀 죽었을 때 그 제자들이 한국, 중국, 대만을 막론하고 일본까지 구름처럼 조문을 왔다 하죠. 교수님 말로는, 조선학생들의 질문은 아예 받아주지도 않는 도쿄제대의 민족차별적이고 고압적인 교수들과 달리, 이들은 순수하게 선생과 제자로 사람을 대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세월은 흘러 일제가 패망합니다.



'메이지쵸'의 경우는 해방, 건국 이후에도 '명동'이라는 이름을 유지하며 종합적 도심으로서 기능, 금융의 중심이자 문화의 중심으로 남아있었지만, '혼마치도리'는 좀 다른 길을 겪습니다. 이름도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을 기리기 위한 '충무로'라는 멋진 이름을 달게 되고, 코가네마치 또한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에서 따 온 '을지로'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지요. 또한 명동 남부에서 광희문까지 길을 시원하게 새로 내면서 일본인들의 생활터전의 흔적은 - 그들이 중국 화교에게 예전에 그랬듯 - 완전히 두동강이 납니다. 그 길의 이름은 퇴계 이황 선생의 이름을 붙여 '퇴계로'가 되었죠.


특히 일제 말기에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폭격을 대비한 소개공지(화재를 막기 위한 공터)를 만들고, 6.25 전쟁으로 남대문에서 동대문이 훤히 보일 지경에 이를 정도로 폭격을 얻어맞으면서, 이 일대는 건물이 전부 재건됩니다.
(한 가지 자투리. 종로에서 퇴계로에 이르는 소개공지는 그 후로도 빈터로 남아있다가 서울시의 개발계획에 의해 미래도시로 그려지는데, 그게 바로 현재의 세운상가에서 진양상가(아래 사진)에 이르는 상가들입니다. 그러나 미래도시적 입체건물로 짓겠다는 당시 정책 입안자의 의도와 달리, 그냥 적당히 삭막한 고층건물이 줄줄이 덜렁 올라가고 끝나죠.)


어쨌든, 지금은 카메라와 인쇄의 거리가 되어 있는 이 곳 을지로2가 - 이곳도 오랜 세월이 흘러....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한창 철거가 진행중입니다.



그 맞은편에는 이제는 세계에서 한가락 한다는 자본들이 거대한 빌딩 안에서 피튀기는 전쟁을 벌이고 있죠.







그러나 비록 건물은 철거되고 모습은 사라지더라도 그 공간사적 의미에 대하여는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살아갈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 2007. 6. 2.




Canon EOS400D, EF18-55mm/55-200mm 번들, F2.8~6.3, AUTO, etc
Yashica Electro35 GS, F5.6~16, 1/250sec, etc, AUTO, Kodak Portra 160VC/ISO100-200, Fuji AUTOAUTO X-TRA 400

- 다음 시간에는 중화 상권의 흔적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주로 음식점 관련 글이 될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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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칼렛 | 2007/06/04 09:51 | 스케치 | 트랙백 | 덧글(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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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호랭이군 at 2007/06/04 10:0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海月 at 2007/06/04 10:21
찬찬히 잘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글이네요. 스칼렛님의 지식과 글솜씨가 참 부럽습니다.
Commented by Argentium at 2007/06/04 10:47
친절한 설명과 사진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실은 링크를 데려간지가 꽤 되는데 이번에 신고합니다. ^^
Commented by 안모군 at 2007/06/04 10:50
잘 쓰셨네요...^^

황금정이라는 이름은 본토에서도 좀 쓰이는 이름일텐데, 보통 유흥가 내지는 상업가에 잘 붙는 이름이죠. 장곡천정은 하세가와마치 내지는 하세가와쵸 라고 불렸을겝니다. 장곡천은 인명에 널리 쓰이는지라 다른 읽기방법은 잘 없을걸요. 그 외에 용산에는 원정(모토마치)가 있었고, 서울역 앞 길을 고시정(후루이치마치)라고 불렀죠.

일본인들 거리명에 장군 이름을 쓴건 말 그대로 "기세제압"적인, 좀 풍수적인 믿음이 들어간 것이라고 하죠. 특히 충무로는 가장 일본인들이 많던 도로라서, 가장 강한 이름을 붙였다고들 하죠.
Commented by Vincent at 2007/06/04 12:19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스칼렛 at 2007/06/04 12:21
안모군// 모토마치가 지금의 원효로일겁니다. 손정목 교수는 그 점을 비판하더군요, 왜 元이란 지명을 살렸냐고...
Commented by 제절초 at 2007/06/04 13:24
이야 잘 읽었습니다^-^ 음악도 잘 어울리고 사진도 멋지네요. 좋은 글과 사진, 정말 고맙습니다.
Commented by 我的雲 at 2007/06/04 13:59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BTamin at 2007/06/04 14:06
잘 읽었습니다.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추천 눌리고 갑니다~!^^
Commented by 銀鳥-_- at 2007/06/04 14:07
오... 이게 또 그런 속뜻이 있었군요. (머엉)
Commented by 三慶 at 2007/06/04 14:19
조모께서 을지로지역 태생이라 할머님 어렸을때 일제치하 을지로 생활 이야기를 제법 많이 들으며 자라왔습니다만, 하지만 길에 관한 정책적이고 역사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처음듣네요 ^^ 감사합니다. 그리고 노래가 참 잘 어울립니다.
Commented by 에제 at 2007/06/04 14:22
와 아예 사진가로 전업하셨나요...?;
좋은 글 공강시간에 잘 읽고 갑니다. 이오공감 2.0에도 오르셨네요^^;
Commented by 불별 at 2007/06/04 14:41
정말 좋은 글입니다. 정말 이글루스에 제가 모르는 고수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오늘도 배웠습니다.
Commented by Mjuzik at 2007/06/04 15:53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Commented at 2007/06/04 15:5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스피리아 at 2007/06/04 16:06
이오공감에서 보고 왔습니다.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배울 점이 많은 곳을 찾은거 같아 기쁜 마음에 링크도 해두고 갑니다. 또 뵐께요. :D
Commented by 耿君 at 2007/06/04 17:05
정말 잘 읽었습니다. 관심이 많은 부분이라 더 유익했어요 ㅎㅎ
Commented by Teres at 2007/06/04 17:40
여자친구의 추천으로 들어왔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서울이 중심가가 도쿄의 일부에서 따온 거라는 막연한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이 글 보니까 확실하게 잘 알게 되네요.

그리고 음악이 참 좋네요. 어떤 곡인지 알 수 있을까요?
Commented by 로코 at 2007/06/04 17:52
와, 정말 잘 읽었습니다.
한국사에 대해서 좀 더 쉽게 일반인들에게 알려주는 분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Commented by 카방글 at 2007/06/04 18:42
잘 읽었습니다.
을지로가 이런 곳인 줄은 몰랐군요
Commented by 크리스 at 2007/06/04 18:51
정말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다음 글도 잘 부탁드립니다. ^^
Commented by 둘잇쿵 at 2007/06/04 19:1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서울 공간을 잘 보여주시네요.
Commented by sunny at 2007/06/04 22:00
제가 살던 아파트.. 그리고 지금은 친정이 되어버린 아파트가 반갑게, 그리고 정겹게 느껴지네요.
공들여 글 쓰신 흔적이 역력합니다.
고맙게 읽고 나갑니다.
Commented by --G-- at 2007/06/04 22:35
정말 좋은 글이군요. 아주 잘 읽고 갑니다.
서영춘 선생님에 대한 언급은 정말 대단하군요.
Commented at 2007/06/04 22:5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darkuldoru at 2007/06/05 00:05
과연 제가 단편적으로 알던 내용을 이렇게 자세하게 알게 되니 정말 기쁜 일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스칼렛 at 2007/06/05 00:52
꺅 나갔다왔더니 무슨 댓글들이 자안뜩... (ㄷㄷㄷ)
모두 다 일일이 달아드리기 힘드니 일단 몰아서 관심(엣다?)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음악은 양방언님의 1집 <The Gate of Dream>의 11번 트랙 <Soul Bohemian의 귀환>이구요....

사실 저도 그렇게 잘 아는 편은 아닙니다. 도시공학이 전공도 아니고, 어릴 때 그냥 관심이 조금 있어서 책이나 논문 읽은 게 다입니다. 특히 이쪽 서울도시 근세사 부분은 본문에도 나와 있는 장경학 교수님의 경험담을 워드편집하면서 읽게 된 게 크죠. 별로 많이 아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띄워주시니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꾸벅)

로코님 외에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는 게 있습니다만, 일반인들이 읽기 쉽게 쓴 책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손정목 명예교수님의 저작들을 추천합니다. 실제로 박정희-전두환에 이르는 30여년을 서울시 도시계획 실무 자리에 있으면서 원조 불도저 시장-_- 김현옥부터 양택식, 구자춘까지 두루 옆에서 지켜보고, 공직에 있을 때나 퇴직 이후에도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긴 분이죠.

三慶// 돌아가신 제 할아버지도 흑석동에 사셨죠 ^^;;;;; 6.25때 할머니께서 부엌에서 밥푸고 있는데 뭐가 삐이이잉 날아와서 보니까 폭탄이더라- 라던가 (......)
에제// 그러는 자네도 잘찍잖아. 그러고보니 방학되면 출사 비스무리하게 함 땡겨야지?
sunny// 헐.. 프로 작가분에게 칭찬받다니. 감사합니다. ^^;
위에 비공개// 음, 사실 저도 국내의 책은 잘 모릅니다. 교수님 자서전이 지금은 출판되었나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나중에 이것만 간단히 정리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Commented by 스이 at 2007/06/05 01:13
자주 다니는 지명들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어머! 라는 감탄사를 내뿜으며.
삐까뻔쩍한 그 명동도 잘난 우리 손으로 만들어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거군요;; 반일감정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알고있는 건 너무 없다는 사실이 새삼 부끄럽네요.

Commented by 오도리 at 2007/06/05 01:14
이오공감에서 보고 왔습니다. 저희 할아버지의 아버지, 즉 증조 할아버지가 화신백화점 옆에 결혼식장을 운영하셨다고 합니다. 저희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그때 당시 신식 결혼이란 걸 하셨구요. 사진까지 찍으셨더라구요. 할아버지는 제비초리 양복 입고, 안경을 쓰고, 할머니는 하얀 면사포를 쓰셨더라지요. 지금 와서 사진을 봐도 넘 멋져요.... 왠지 로맨틱~~ 울 아버지는 그 때 예식장만 잘 지켰더라도... 뭐 이런 한탄? 아니면 아쉬움이 가득한 소리를 하시곤 한답니다. ^^
Commented by inthesky at 2007/06/05 02:13
아픔과 역사를 가진 도시, 서울이군요

잘 보았습니다.
Commented by 플리 at 2007/06/05 02:2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은행 이야기는... 저희 아버지가 몇십년을 그 곳에서 일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확실하게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는 것 같아서 좋네요. ^^
Commented by kjhan at 2007/06/05 02:45
이오공감 보고 왔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을지로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할아버지 대에 입정동에 집을 겸한 가게가 있어서 을지로 하면 남다릅니다. 공구상가가 있는 곳으로 기억하는데, 청계천 공사한 이후로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네요. (최근에 가본 적이 없어서..;;)
Commented by 이요이요 at 2007/06/05 02:56
너무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전 남산 밑에 필동에 살고 있고 퇴계로에 직장이 있으며 남대문,명동,을지로,종로에서 많이 돌아디거든요..
제가 늘 다니면서 보던 동네라 몰랐던 사실도 알게되니..다음에 또 위에 나온 사진의 장소를 지날때 한번더 생각을 하게될것 같네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손에 의해 개발되고 일본인들이 북적였을 그곳이 지금은 그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있네요..
물론 생계가 걸린 비지니스 때문이지만 일본간판이나 안내문도 늘어나고..
음..괜히 느낌이 이상하네요...^^
Commented by 이나시엔 at 2007/06/05 03:51
사진이랑 설명이 참 좋네-
전주는 서울에 비하면 변한게 많이 없는 도시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건 아닌데, 오빠 글 읽으니까 왠지 궁금해 진다. 냠.
Commented by 유우샤 at 2007/06/05 09:16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많이 배웠고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
아참. 링크 모셔갈께요. 역사쪽은 관심이 많아서 자주 찾아 뵙고 배우고 싶네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Commented by 플루토 at 2007/06/06 04:14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오공감덕분에 오랜만에 감동을 건졌네요. ^^
Commented by verisimo at 2007/06/06 07:00
간만에 멋진 글 쓰셨구랴 :) 사진들이 참 멋져요. >.<
Commented by Omoroso at 2007/06/07 00:35
이야... 대단하십니다
Commented by FreeMan at 2007/06/08 01:16
정말 잘 읽고 갑니다.

평소에 다니던 곳들이 어느정도 사연이 있을거라고는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상세히 알게될줄은...^^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Commented by creent at 2007/06/11 01:28
37년도 서울 지도를 보고 떡실신;해서 모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야... 남에게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지식을 취미로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Commented by 스키아。 at 2007/06/11 01:50
밸리에서 왔습니다^^
최근에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란 책을 접했었는데, 글이 딱 그 연장선상에 있는 글이네요^^
좋은 사진과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Commented by Chester at 2007/06/11 02:37
매일 다니던 길들의 역사를 상세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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